드디어 [몰입] 시리즈의 막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몰입:Think Hard]로 시작해서 [몰입의 즐거움]을 거쳐 칙센트 미하이 칙센트 교수의 대표작 [FLOW]를 마지막으로 보게 되었다.
황농문 교수의 글에서는 '몰입적 사고'에서 센세이셔널한 충격을 받았고
[몰입의 즐거움]에서는 몰입에 대한 핵심과 개괄적인 개념들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다면
이번 [FLOW]는 보다 광범위하고 그의 Flow이론의 정수를 담고 있다.
책표지의 찌라시처럼 SBS스페셜에 이 책이 나왔는데
저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할아버지는 이 책을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자신의 연구가 자신과 일치되는 아름다운 순간처럼 느껴졌다.
이 책을 모두 읽고 나서는 그의 그런 모습이 더욱 눈에 선하다.
책의 구성을 간단히 정리하자면
[행복, 다시 생각해 보기]라는 내용을 통해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가 다시한번 살펴본다.
[의식에 관해서 알아보기]라는 두번째 장에서는 의식적 무질서 상태와 질서정연한 상태를 엔트로피와 플로우로 분류하며 자아와 주의 복합성등 FLOW 이론의 근간이 되는 개념들에 대해 다루고 있다.
[즐거움을 통해 삶의 질 향상하기]에서는 쾌락과 즐거움을 비교하면서 Autotelic(자기목적적)의 개념을 도입힌다.
[플로우의 조건들 알아보기]에서는 FLOW상태를 끌어내기 위한 유리한 환경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우리 몸을 통해 플로우 얻기]는 말그대로 신체를 통한 FLOW를 유출해 내는 것을 다루고 있으며
바로 그 다음장은 [지적 활동을 통해 플로우 찾기]에서는 과학,철학,예술 등을 통한 지적인 활동을 통한 FLOW현상을 다룬다.
[일 속에서 플로우 경험하기]는 우리가 하고 있는 일 자체에서 FLOW를 끌어내는 방법을 생각해보며
[혼자 있음과 함께 있음을 즐기기]에서는 보다 광범위하게 개인안에서만이 아닌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FLOW를 형성할 수 있는 방법을 다루고 있다.
[혼란에서 벗어나기]에서는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FLOW가 가능함을 다루고
[의미 창조하기]에서 책의 내용을 한데 묶으면 맺고 있다.
그리고 그 뒤로 이어지는 한 챕터 이상 분량의 주석들..
* 플로우란 행위에 깊게 몰입하여 시간의 흐름이나, 공간, 더 나아가서는 자신에 대한 생각까지도 잊어버리게 될 때를 일컫는 심리적 상태이다....개념적으로 플로우 상태는 따분함과 불안함 사이에 위치한다. 자신의 기술 수준이 과제가 주는 어려움에 미치지 못할 때는 불안함을, 반대로 기술 수준이 어려움보다 더 높을 때는 따분함을 느끼게 된다.
* 플로우는 도전적인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때 따라오는 내적인 보상이다.
* 미하이는 최근 긍정적 심리학(Positive Psycholigy)이라고 부르는 새로운 분야의 제창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이를 주도하고 있기도 하다.
[Hapiness Revisited]
* 2,300년 전 아리스토텔리스는 "인간은 세상 무엇보다도 행복을 더 추구한다"고 단언한 바 있다.
* "행복이란 것은 우연히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바로 이것이 나의 '발견'이다.
* 누구에게나 한번쯤은 이런 외적 조건들에 의해 압도되지 않고, 우리의 행동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으며, 내 운명은 내가 주인인 듯한 느낌이 드는 순간들이 있을 것이다....이런 경험을 최적 경험(Optimal Experience)이라고 한다....최적 경험은 거저 생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노력해서 만드는 것이다.
* 사실상 우리가 높은 목표를 가진다는 것은 이를 이루기 위한 과정을 즐기면서 노력하고 있다면 하등 문제될 것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목표를 이루는 데 너무 집착한 나머지 현재 삶으로부터 즐거움을 얻지 못하는 데 큰 문제가 있다. 이런 현상이 발생하면, 더 이상 자신의 삶에 대해 만족을 느끼기도 힘들어지는 것이다.
비록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욕망의 패러독스를 경험하고 있긴 하지만, 나름대로 돌파구를 찾은 사람들도 있다. 이 사람들은 그들이 소유한 물질적 조건에 상관없이 삶의 질을 스스로 향상시켜 가고 있으며, 만족을 느끼고 있다. 더군다나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행복을 조금씩 나누어 주고 있기에 그들의 미래 또한 긍정적이다.
이 사람들은 열심히 살고 있으며, 다양한 경험을 즐기며, 죽는 순간가지 배우려고 노력하며, 자신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 진실한 관계를 맺는다. 지루한 일이든 어려운 일이든 무엇을 하든지 즐길 수 있으며, 삶에 대해서 싫증을 느끼지 않고, 어려운 문제를 잘 해결해 나간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강점은 이들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 혹시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데 식당 한쪽에선 문 닫을 준비를 하면서 자리 정돈을 하고 있는 경우가 있었는가. 이런 느낌과 같다고 할 수 있을까. 생명의 유한성은 우리에게 "자, 이제 너의 시대는 끝이야, 다음을 준비할 수밖에 없어"라는 메시지를 전해 준다. 세상 누구도 이 메시지를 편히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다.
* 한걸음만 물러나서 반성해 보면, 이런 노력들이 결국 헛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즉 돈.권력.지위 그리고 물질적 소유 등이 그 자체로는 절대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 말이다.
* 이것저것 시도해 보는 노력이 무용지물이 되면, 어떤 사람들은 아예 포기하고 세상으로부터 은둔하기도 한다. 볼테르의 소설 [캉디드]의 주인공처럼 이들은 세상을 등지고 자기의 조그만 정원을 가꾸면서 살아간다.
* 심리학은 성인기의 비상식적 행동들이 아동기에 경험했던 좌절의 결과일지도 모른다는 통찰을 우리에게 제공했다. 이러한 통찰 이외에도 심리학은 우리에게 유옹한 도구가 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다음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나가는 데 길잡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질문이란 다음과 같다.
"자, 과거의 경험들이 어떠했건 간에 지금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면, 미래를 위해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 자율성을 갖기 위해서는 자기 행동에 대해서 스스로 상도 주고 벌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외적 여건이 어떻든지 간에 스스로 즐거움과 삶의 목적을 발견해 나가는 능력을 개발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제는 쉽다고 할 수도 있고 어렵다고 할 수도 있다. 쉽다는 것은 이렇게 하는 것은 오로지 자기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점이고, 어렵다는 것은 어느 시대에서도 쉽지 않을 자기 단련과 인내를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가 경험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인가에 관하여 자기 삶의 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해야 한다.
* 에머슨이 말한 것처럼, "살아가려고 바동대기는 하지만, 정말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 문명이란 것은 사람들의 욕망을 억압한 토대 위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 16세기 투르크 제국은 용병을 모집할 때, 정복한 땅의 여성들을 겁탈할 수 있다는 유인책을 제시한 적도 있다. 오늘날에도 미군을 뽑는 광고에는 육군이 되면 '온 세상을 경허말 수 있다'는 문구가 버젓이 적혀 있지 않은가.
* 즐기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될 것은 없다... 쾌락이라는 것의 실체를 파악하고, 쾌락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겨 높은 순위를 매긴 자신의 일을 위해서는 쾌락 경험을 통재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 문제는, 필(feel)을 느끼는 것만이 본질적인 것이라는 최근의 시대적 흐름이다....지금껏 우리를 통제해 왔던 사회적이고 유전적인 힘들을 아무런 의심 없이 무조건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곧 자기의 의식에 대한 통제권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술과 음식의 유혹을 거절하지 못하거나 섹스에만 온갖 관심이 쏠려 있는 사람은 그의 심리적 에너지를 자유롭게 활용할 수가 없다.
* 필요한 상황에서 유전적 지시를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은 매우 허약해진다...인간은 사회적으로 건강하고 독립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본능적 욕구를 조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렇제 못하면 이 욕구를 조작하는 남들에게 당하기 쉽다.
* 완전히 사회화가 된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결정된 보상을 받고 만족하는 사람이다....
복잡다단한 사회에서 여러 가지의 강력한 집단들이 서로 다른 목표들을 우리에게 주입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학교.교회.은행 등의 집단들이 우리들을 열심히 일하고 절약하는 사람들로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고, 다른 한편에선 상인.제조업자.광고즈들이 우리들의 소비를 부추기기 위해서 꼬드긴다. 심지어는 전문 도박꾼.포주.마약 밀매업자 등에 의해서 움직이는 어둠의 세계조차도 우리가 돈만 내면 원하는 것을 다 해주겠다는 똑같은 메시지를 전하지 않던가. 각 집단마다 전하는 메시지의 내용은 약간씩 다르지만, 그 메시지에 복종한 결과는 동일하다. 그것은 우리를 목적 달성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만들어 결국에는 우리들이 그 사회의 시스템에 의존할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 자신을 사회적 통제로부터 해방시키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무엇일까? 바로 순간 순간에 주어지는 보상을 발견하는 능력을 갖는 것이다. 만약 사람이 경험의 흐름에서 주어지는 의미를 발견하고 즐길 수 있다면, 그의 어깨를 무겁게 누르고 있는 사회적 통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보상을 자기의 내면에서 찾을 수 있다면, 그 동안 사회에 맡겨 두었던 본인의 힘을 다시 찾을 수 있다. 이젠 더 이상 미래라는 허울 속에 숨어 버리는 목표를 ㄷ잘성하기 위해서 아옹다옹할 이유가 없다.
* 우리는 몸이 원하는 것으로부터 독립적이 되어야 하며, 우리 마음속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고통과 쾌락은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며 그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 현실을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의식을 통제하고, 외부의 꼬임과 협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함으로써 우리는 이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다.
로마 제국의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오래전에, "사물 자체가 무서운 것은 아니다. 우리가 어떻게 사물을 지각하는가, 단지 이것이 무서울 뿐이다"라고 했다.
또한 아우렐리우사 황제도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았던가.
"네가 외적인 일들로 인해서 마음 고생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 일들 때문이 아니라 네가 그것들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에 의해서다. 그 평가와 판단을 한꺼번에 지워버릴 수 있는 것도 너의 손안에 달려 있다."
* "마음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서 삶의 질이 달라진다."...
고대 델피 신전의 신탁인 '너 자신을 알라'....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환의 덕행'....
고대 스토아 학파에 의해서도 발전되었다....
기독교 수사들도 우리의 사고와 욕망을 절제하는 방법을 가다듬었다.
* 마음의 무질서함(chaos)이 주는 협박으로부터, 본능적인 욕구로부터, 또한 사회의 통제로부터 벗어나는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 사람들이 자유로워지는 방법과 자신의 삶을 조절할 수 있는 방법을 수년 전에 알았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왜 우리는 아직도 이 방법을 더 발전시키지 못했을까?
현명함이라는 지식은 본질적으로 누적되는 것이 아니라는 데 그 첮번째 이유가 있다. 이것은 공식화되지 못하며, 암기해서 단순하게 적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현명한 정치적 판단, 세련된 미적 감각과 같은 전문적 영역처럼 의식을 해방시키는 방법도 숱한 시행착오를 거쳐서 값지게 얻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의식을 통제한다는 것은 단순한 인지적 기술이 아니다. 지능과 비슷하다고 할까, 이것은 감정의 몰입과 의지를 필요로 한다. 이것은 앎이 아니라 행동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작곡가가 이론적으로 알고 있다고 해도 수많ㅇ느 연습을 거쳐야 좋은 곡을 쓸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두 번째 원인은, 우리의 의식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에 관한 지식은 문화와 시간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것이다....의식을 통제하는 것은 제도화될 수 없다. 이것이 사회적 규범이나 제도의 한 부분이 되는 순간 더 이상 그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자아(ego)를 억압하는 힘들로부터 해방하자는 프로이트의 노력은 이미 그가 살아 있을 때부터 하나의 고착된 이데올라기로 변화했다. 마르크스의 경우는 더 심하다 경제적 착취로부터 우리의 의식을 해방하자는 그의 주장은 마르크스 자신도 섬뜩할 정동듸 억압적인 사회 제도로 변질되지 않았던가. 또한 도스토예프스키를 비롯한 많은 사람ㄷ르이 말했듯이, 만약 중세 시대에 예수가 자신이 설파했던 해방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다시 돌아왔다고 해도, 예쑤의 이름을 빌려 권력을 가지고 있던 세속적 종교 지도자는 다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을 것이다.
[The Anatomy of Consciousness]
* 역사를 훑어보면 스스로의 사고와 감정을 다스릴 때까지는 아직 온전한 인간이 되지 못했다고 간주하는 문화들이 존재해 왔다.
* 외적인 역경이나 장애물을 감내하는 인간의 능력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소중한 것이다.
* 의식이란 의도적으로 순서회된 정보라고 할 수 있다....
외부의 사물은 우리가 인식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의식은 어찌 보면 주관적으로 경험한 현실을 말하는지도 모른다....
의식을 통해서 반영되는 것이 우리의 삶인 것이다...
* 의식의 정보들을 순서화하는 힘을 의도라고 부른다....
의도 자체도 생물학적 요구 또는 내재화된 사회적 목표에 의해서 만들어진 정보들이다.
의도는 우리의 주의를 어떤 것으로부터 다른 것으로 옮겨가게 하거나, 좋아하는 것에 오랫동안 정신을 집중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런 의도의 발현은 종종 다른 이름, 이를테면 본능.욕구.충동.욕망으로 불린다.
* 사회적 규범을 초월하거나 일탈한 사람들(영웅.성자.현자.예술가.시인.광인.범죄자 등)은 일반인들과는 다른 삶의 목표를 갖는다. 이런 사람들의 존재는, 우리의 의식이 서로 상이한 목표와 의도들로 순서화될 수 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우리 내면의 주관적 세계를 통제할 지유를 가지고 있다.
* 실제로 우리가 동시에 처리할 수 있는 것들은 그리 많지 않다. 어떤 문제를 골똘히 생각하면서 동시에 행복함과 슬픔을 느끼기는 힘들다. 또한 걸으면서 노래하고, 동시에 은행 잔고를 계산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하나의 활동들이 주의의 대부분을 소진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 미국인들은 여가 시간의 무려 절반에 해당하는 시간을 텔레비전 시청으로 써버린다. 텔레비전을 볼 때 시각적 정보를 처리하는 능력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 내용들이 너무나 뻔하고 반복적이기 때문에 사고 능력.기억 능력.우리의 의지 등은 거의 필요하지 않다. 당연한 결과이겠지만, 사람들은 텔레비전을 시청할 때 집중력.사고의 명확성.자신감 등이 매우 낮은 상태라고 말한다.
* 주의...
지천에 깔려 있는 수많은 정보들 가운데 우리에게 필요한 것만 선택을 하는 것이다. 적절한 기억을 인출하기 위해서, 주변에서 발생한 일들을 평가하기 위해서, 그리고 후속 조치를 위해서 우리는 주의를 필요로 한다...
주의는 동시에 처리할 수 있는 정보 이상에 대해서는 오렛동안 집중을 할 수 없다.
* 주의 구조가 문화나 직업에 따라서 얼마나 다양하게 달라지는지는 실제 사례들을 보면 명백해진다. 에스키모 사냥꾼들은 열 가지도 넘는 서로 다른 종류의 눈을 구별 할 수 있고, 바람의 방향과 풍속을 항상 민감하게 지각할 수 있다. 멜라네시아의 선원들은 본토로부터 천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바다에 떨어뜨려도 몸을 통해서 전달되는 조류의 흐름만 가지고도 어디쯤 가고 있는지를 척척 알아낼 수가 있다. 음악가는 일반인들은 의식하지 못하는 음의 미묘한 차이를 느낄 수 있도록, 주식 거래 전문가는 시장의 조그마한 변화를 파악할 수 있도록, 좋은 의사는 환자의 미묘한 변화를 감지할 수 있도록 주의가 개발되는 것이다.
* 우리의 의식상에 떠오로는 것들을 결정하는 것이 주의인 까닭에, 또한 기억.사고.느낌.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주의가 필요하기 때문에, 주의를 심리 에너지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다. 주의를 에너지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주의 없이는 일을 할 수가 없으며, 또한 일을 하는 가운데에서 주의가 점점 떨어지기 때문이다.
* 주의는 경험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가장 유용한 도구인 것이다.
* 우리의 의식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이 바로 심리적 무질서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미 마음먹었던 의도나 이를 실행하는 것을 방해하는 정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런 상태로 어떤 경험을 하느냐에 따라서 여러 가지 이름을 붙이는데, 바로 고통.공포.불안.분노.질투와 같은 것들이다.
* 정보가 우리의 의식을 방해할 때마다 우리는 심리적 엔트로피라고 불리는 내적 무질서 상태, 즉 자아 기능의 효율성을 손상시키는 상태를 맞게 된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우리의 자아는 주의를 집중하여 목표를 수행하는 능력을 상실한다.
* 심리적 엔트로피의 반대 상태는 최적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인식 속으로 들어온 정보가 울의 목표들과 일치하게 되면 심리적 에너지가 무리 없이 작용한다.
* 최적경험이란, 의식이 잘서 있게 구성되고 또한 자아를 방어해야 하는 외적 위협이 없기 때문에 우리의 주의가 목표만을 위해서 자유롭게 사용될 때를 말하는 것이다. 이미 이러한 상태를 플로우 경험이라고 이름 붙였다....
많은 사람들이 최적경험을 묘사할 때, '마치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가는 느낌' 또는 '물 흐르는 것처럼 편안한 느낌' 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플로우는 심리적 엔트로피의 정반대 개념인데, 이런 까닭으로 네겐트로피(negentropy)라고 불리기도 한다.
* 우리가 가능한 한 자주 플로우를 경험할 수 있도록 의식을 조절하면 삶의 질은 저절로 향상되게 마련이다.
* 역설적이게도, 다른 외적 목표를 위해서가 아니라 행위 자체를 질길 때 우리의 삶이 향상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하나의 목표를 수립하고 이를 위해서 최고의 집중력을 보일 때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즐거움을 맛보기 시작하면 다시 이를 경험하기 위해서 더 많은 노력을 할 것이도, 이런 과정의 순환을 통해서 우리의 자아는 성장한다.
[Enjoyment and the Qualitry of Life]
* 삶의질을 향상시키는 데 우리가 채택할 수 있는 주요 전략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외적 조건들을 삶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두 번째는 외적 조건들이 우리의 목적에 더욱 잘 부합되도록 우리가 경험하는 방식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 마이다스 왕의 신화는 외부 조건을 통제할 수 있다고 해서 반드시 삶이 향상되지는 않는다는 점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 <미국인의 삶의 질>이라는 제목으로 발행된 조사결과를 보면, 책임 연구자들은 재정적 상황이 인생의 전반적 만족에 영향을 주는 요인 중에서 가장 덜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라고 보고했다.
* 쾌락이란, 생물학적 프로그램이나 사회적 환경에 의해 설정된 기대 수준이 충족되었다는 정보를 우리가 의식하게 될 때 느끼는 만족감이다....
쾌락은 질서를 유지하게 해주지만, 그 자체가 의식에 새로운 질서를 창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즐거움이라는 것은 사람이 이전에 기대했던 바를 성취하거나 어떤 욕구를 충족시켰을 때 생긴다....
쾌락을 주는 경험은 즐거움을 줄 수가 있다. 그러나, 쾌락과 즐거움이라는 두 가지 정서는 같지 않다....
정신적 노력 없이도 쾌락을 느낄 수는 있지만, 즐거움이라는 것은 비범한 주의를 기울여야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새로운 능력을 학습할 때 보여 주는 황홀한 표정은 즐거움이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잘 말해 준다.
* 즐거움의 요인은 무엇이로 이루어 지는가
첫째, 그 경험은 일반적으로 본인이 완성시킬 가능성이 있는 과제에 직면했을 때 일어난다.
둘째, 본인이 하고 있는 행위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와 넷째, 수행하는 과제에 대한 명확한 목표가 있어야 하고 즉각적인 피드백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다섯째, 일상에 대한 걱정이나 좌절을 의식하지 않고 자연스럽고도 깊은 몰입 상태로 행동할 때이다.
여섯째, 즐거운 경험은 사람들에게 본인의 행동에 대한 통제감을 느끼도록 해준다.
일곱째, 자아에 대한 의식이 사라진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플로우 경험이 끝나면 자아감이 더욱 강해진다.
마지막 여덟째, 시간의 개념이 왜곡된다. 즉 몇 시간이 몇 분인 것처럼 느껴지고, 몇 분이 몇 시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러한 모든 요소들이 즐거움을 불러일으키는데, 이것은 너무나 충만한 느낌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를 위해 많은 정력을 쏟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 에드먼드 버크는 "우리와 대적하는 자는 우리의 정신ㅇ르 강화시켜 주고 우리의 능력을 다듬어 준다. 적은 결국에는 나에게 큰 도움을 주는 자이다"
*"바다에 아무리 많은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사람들의 염려는 수평선 뒤로 육지가 멀어져 감에 따라 마음에서 사라집니다. 일단 바다에 나가면 걱정을 한들 아무 소용이 없어요. 다음 항구에 도착할 때까지 일상의 문제에 대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요. 그 순간에는 우리의 삶에서 인위적인 요소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바람과 바다의 상태와 하루 동안의 항해 거리에 비교하면 속세의 문제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 사람들이 즐기는 것은 통제되는 상황 속에 존재한다는 느낌이 아니라 어려운 상황에서 스스로 통제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 일반적으로 도박을 하는 사람들은 종종 자신들이 적어도 그 경기의 제한된 목표와 규칙 안에서는 미래를 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런 통제감은 도박의 경험이 제공하는 가장 큰 유혹 중의 하나인데, 이는 모든 문화에서 볼 수 있는 예언이나 점과 같은 의식활동에서도 나타나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느낌이다.
* 나보코프의 단편 소설 [루친의 방어]는 젊은 체스 천재에 관한 이야기인데, 체스에 너무 빠진 나머지 그의 인생(결혼.우정.삶)은 온통 체스와 연관되어 있었다. 루친은 일상의 문제에 대처하고자 노력하지만 체스에 비추어 보지 않고서는 문제를 인식할 수가 없었다. 예컨대 그의 아내는 화이트 퀸으로 세 번째 줄 다섯 번째 칸에 서서 루친의 대리인인 블랙 비숍에 의해 위협을 받고 있다는 식이다. 루친은 개인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체스 전략에 의지했고, 외부의 공격을 이겨낼 수 있디록 하는 방어 수단인 '루친의 방어'를 만들고자 한다. 실제 생활의 인간 관계들이 꼬이기 시작하자 루친은 일련의 환성을 가지게 되는데, 그 환상이란 주위의 사람들이 커다란 체스판 위에 서서 자신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문제에 대한 완벽한 방어의 환상을 갖는다. 그가 완성시킨 방어란 호텔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는 것이었다.
* 자의식이 없어진다는 것이 자아가 없어진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특히 의식의 상실을 내포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자아에 대한 인식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 외로운 항해사가 오랜 시간 동안 밤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면, 그는 배가 자신의 연장선이며 같은 목표를 향해 동일한 리듬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느끼기 시작한다.
* 자기목적적(autotelic)이라는 용어는, 자기를 의미하는 오토(auto)와 목적을 의마하는 텔로스(telos)라는 두 개의 그리스 단어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단어는 미래의 이익에 대한 기대없이 단순히 그 자체를 수행하는 것이 보상이 되는 행동을 의미한다....
경험이 자기 목적을 가지고 있을 때 개인은 활동 자체를 위해 주의를 기울이지만, 자기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을 때 관심은 그 결과에 집중된다.
* 자기 목적적 경험 또는 플로우는 삶의 진로를 다른 수준으로 끌어올린다. 소외감은 참여로 바뀌고, 즐거움은 지루함을 대체한다. 또 무력함이 통제감으로 전환되며, 외적 목표를 수행하는 데 소비되었던 심리 에너지는 자아를 강화하는 데 쓰인다. 경험이 내적으로 보상을 받을 때 삶은 미래의 가상적 보상에 저당 잡히는 대신 현재에서 의미를 갖게 된다.
[The Conditions of Flow]
* 프랑스의 심리인류학자 카이유아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게임 - 넓은 의미로 모든 종류의 놀이 활동 - 을 가가 활동이 제공하는 경험에 따라 네 개의 큰 범주로 나누었다. 우선 '아곤(agon)'은 경쟁을 하는 게임이다. 대부분의 스포츠와 체육 활동이 이에 속한다. '알레아(alea)'는 주사위부터 빙고에 이르기까지 '확률' 또는 '요행'을 바라는 게임을 말한다. '일링크스(ilinx)' 또는 '버티고(vertigo)'는 일상적인 지각을 변형시켜 의식을 바꾸는 활동을 말한다. 회전 목마, 스카이다이빙 등이 여기에 속한다. 미미크리(mimicry)'는 대안적 현실이 창조되는 활동을 뜻한다. 일반적으로 춤.연극.예술관련활동이 여기에 포함된다.
* 현실에 대한 지각 방식을 바꾸는 모든 활동은 즐겁다. 이는 술.마약 등 모든 형태의 환각제가 가지는 마력에 대해 잘 설명해준다. 하지만 이것들을 통해서 의식이 확장되지는 않는다. 우리가 기껏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 내용물을 섞어서 의식이 좀더 넓어진 것인 양 느끼는 것뿐이다. 하지만 결국은 그와 같은 의식의 인위적 조작으로 인해 의식에 대한 통제력을 잃게 된다.
* 한 문화의 가치를 다른 문화를 평가하는 데 사용하는 것은 매우 부질없는 일
* 일본 교토 남부의 이세 지역에 있는 '위대한 사원(이세다이진구)'에서 찾을 수 있다. 이세의 사원은 약 1,500년 전에 인접한 마을들 중 한곳에서 처음 설립되었다. 이후 20년에 한 번 꼴로 사원은 헐려지고 인접 마을에 다시 세워지기를 반복해 왔다. 따라서 1973년까지 총 16회에 거쳐 - 14세기경 상대 영주와의 분쟁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이사를 하지 못했다. - 이사를 한 셈이다.
* 몇 세대 전에 살았던 사람들과 비교해 볼 때, 우리에게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기회가 훨씬 더 많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조상들보다 삶을 더 즐기고 있다는 증거는 없다. 기회 그 자체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러한 기회를 이용할 수 있는 기술 또한 필요하다. 또한 의식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를 아는 것도 필요한데, 이는 대부분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우지 못한 기술이기도 하다. 선택할 수 있는 레저 활동의 종류도 다양하고 풍부하며 레저에 필요한 장비들도 즐비하건만, 많은 사람들은 따분하고 지루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느낀다.
* '과도한 자의식' 역시 플로우 경험을 방해하는 또 하나의 장애 요인이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걱정하며, 나쁜 인상을 주지는 않을까 혹은 남이 못마땅해할 일을 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는 사람은 진정한 즐거움을 영원히 경험하지 못한다. 지나치게 자기 중심적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자기 중심적인 사람은 보통 자기 의식적이지는 않지만, 대신에 무엇이든 사소한 것 조차도 그것이 자신의 바람과 얼마나 일치되는가를 따져서 평가한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뭐든지 그 자체로는 가치가 없다. 예를 들어 만약 꽃도 이용할 수 없는 것이라면 다시 볼 만한 가치도 없다고 본다. 자신의 흥미를 끌지 않는 여자나 남자에게는 더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환전히 자신의 목적에 맞추어 자의식이 구조화되어 있으며, 그러한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어떠한 것도 의식 안에 담아두지 않는 것이다.
* 소외는 여러 가지 면에서 무질서 상태와 반대로 해석된다. 즉 소외란, 사람들이 사회 체계에 의해 제한을 받기 때문에 자신의 목표와 부합하지 않는 방식으로 행동하는 상태를 일컫는다.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작업장의 조립 라인에서 무의미하고 똑같은 과제를 수백 번씩 반복해야 하는 노동자는 소외를 결을 수 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소외를 일으키는 가장 짜증나는 일은, 불가피하게도 여가 시간의 상당 부분을 음식과 옷을 사기 위해서, 공연을 보기 위해서 또는 끝없이 복잡한 허가 절차를 밟기 위해서 줄을 서는 데 써야 한다는 것이다.
* 다양한 상황에서 자기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은 자극을 선별해 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 순간에 무엇이 적절한지 결정하여 이에 초점을 맞출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시사해 준다....
의식을 통제하는 것을 배운 사람들은 모든 정신적 처리과정을 차단할 수 있으며 적절한 것을 가려낼 수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정보 처리에 쏟는 노력이 줄어들게 된다. 이것이 주의에 대한 융통성이며, 이러한 특징은 정신분열증 환자들이 겪는 과잉 포함 문제와는 무철 대조적이다.
* 최적 경험을 유발하는 특정 가정 환경 유형의 특징...
-명료성
-중심성
-선택성
-부모의 신뢰성
-도전성
목표와 피드백의 명료한 제시, 통제감, 당면한 과제에 대한 집중, 내적 동기화 및 도전 의식을 독려하는 가정 환경에서 성장한 아이들은 일반적으로 그렇지 않은 환경의 아이들과 비교해 볼 때, 플로우를 경험할 수 있는 더 나은 기회를 갖는다...
자기 목적적 환경의 아이들은 그렇지 않은 아이보다 더 행복하고, 강하고, 명랑하고, 만족스러워했다.
* 어려운 상황에 처했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연구해 왔던 학자인 로건은 자신의 연구를 토대로, 난관에 부딪혔던 사람들이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객관적으로 처절한 상황을 주관적인 생각을 통해서 통제가 가능한 경험으로 전환시키는 방법을 찾아내었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지었다. 성공적으로 경험을 전환했던 이드릉ㄴ 플로우 활동의 절차를 따랐다. 우선, 자신의 환겨엥서 가장 사소해 보이는 세부 사항애 집중을 하여, 주어진 환경에서는 거의 가능하지 않아 보이는 행동의 기회를 그 상황에서 찾아냈다. 그러고 나서 자신들이 처한 위험 상황에서 적절한 목표를 세우고, 자신들이 받았던 피드백을 통하여 어느 정도 진전이 있었는지 꼼꼼히 살펴 보았다. 그들은 언제나 목표에 도달하면 난이도를 올렸다. 즉 자신을 위해 점차 복잡한 도전을 한 것이다.
* 나는 미국 공군 첩보 기관에서 일했던 사람에게 한 베트남 참전 군인의 경험담을 들은 적이 있다. 그는 오랫동안 북베트남의 정글 수용소에 감금되어 몸무게가 80파운드나 줄 정도로 모진 고생을 했다고 한다. 그가 수용소에서 석방되었을 때 했던 첫 번째 부탁 중의 하나는 골프 경기를 하자는 것이었다. 골프를 하기에는 컨디션이 매우 좋지 않았지만, 아주 몃진 경기를 해서 동려 장교들은 깜짝 놀랐다. 동료들이 어떻게 이렇게 잘 칠 수 있는지 물었을 때, 그는 감금되어 있는 동안 매일매일 골프 클럽을 고르고, 어프로치 샷을 하고, 체계적으로 코스에 변화를 주며 18홀 게임을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고 대답했다. 이러한 원칙이 온전한 자신의 정신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왔을 뿐 아니라, 잘 연마된 자신의 신체 기술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 역경이 우리를 마비시킬 정도로 위협적일 때도 심리적 에너지를 투입하는 데 새로운 방향을 찾음으로써, 즉 외적인 힘이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목표를 발견하여 통제할 필요가 있다.
* 생존자들은 '비(非)자의식적 개인주의' 즉 자신만을 생각하기보다는 어떤 강한 목적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특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모든 상황에 최선을 다하는 경향이 있으나, 자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데 일차적인 관심을 두지는 않는다. 내재적으로 자신의 행동에 동기화되어 있기 때문에 외적인 위협에 의해서 쉽게 방해받지는 않는다. 자유롭게 자신의 환경을 객관적으로 살펴보고 분석할 수 있는 충분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을 수 있다.
* 주로 자신의 자아를 보호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는 자기애적 개인주의자들은 외적 조건이 위협적일 때 쉽사리 좌절한다. 또한 이들은 뒤따르는 정신적 공황으로 인해 해야할 것을 하지 못한다. 의식의 질서를 다시 회복하기 위한 노력으로 주의가 내부 세계로 모아지고, 외적 현실과 협상하는 데 필요한 주의는 별로 남아있지 않는 것이다.
* 20세기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 한 명인 버트란트 러셀은 개인적 행복을 성취하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점점 나는 내 자신과 나의 결점들에 대해 무관심해지는 법을 배웠다. 점차 내 주의의 중심은 외부의 대상, 즉 만물의 상태, 다양한 지식의 영역, 내가 애정을 느끼는 개인들에게 맞추어졌다."
[The Body in Flow]
* 캐벨은 "아무리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몸이라는 잔고는 있다. 그렇지만 이 잔고는 우리에게 매우 흥미로운 즐거움을 선사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우리에게는 불행하거나 우울할 때 그리고 지루할 때 언제나 활용할 수 있는 치료법이 있다. 즉 우리의 신체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다...
우리의 신체를 통해서 기쁨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는 사실은 그리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 몸이 하는 그 어떤 일도 즐거운 것이 될 수 있는 잠재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잠재성을 경시하고 신체적 기능을 최소한으로만 활용함으로써, 플로우를 제공할 수 있는 신체적 능력을 개발하지 못한 채 생활하고 있다.
* 단지 몸을 움직이는 것만으로는 플로우를 경험할 수 없다는 점이다. 플로우에는 언제나 정신이 개입되어 있다는 점을 주지해야 한다.
* 현대 올림픽 경기의 표어인 "더 높게, 더 빠르게, 더 강하게(Citius, Altius, Fortius)"...
* 가장 단순한 신체적 행위도 플로우를 생성해 낼 수 있도록 변형시킬 수 있다면 즐거운 것이 될 수 있다. 그 변화 과정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1)궁극적 폭료를 세운 후 그에 맞는 실행 가능한 하위 목표들을 최대껏 많이 설정한다.
(2)설정한 목표들의 달성 정도를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3)하고 있는 일에 집중하며, 그 활동과 관련된 도전 목표들을 최대한으로 세분하여 구분 짓는다.
(4)주어진 기회를 십분 활용하기 위해 필요한 기술을 연마한다.
(5)해당 활동이 지루해지면 목표를 계속 높여간다.
* 육체적 쾌락과 장만적 관례를 즐기는 단계에서 더 나아가 연인들이 상대방을 진심으로 배려할 때 세 번째 차원의 성이 시작된다. 그렇게 되면 이들은 또 다른 도전 목표를 발견하게 된다. 즉 상대방을 유일무이한 존재로 인정을 하며, 이해하고, 서로의 목표를 이루어 나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 것이다. 이런 차원으로까지 발전할 때 성은 매우 복합적인 과정이 되며, 평생을 통해서 플로우 경험을 제공할 수 있다.
* 어떻게 하면 사랑을 항상 새롭게 유지할 수 있을까? 그 해답은 다른 활동의 경우와 다르지 않다. 사랑의 즐거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복합적인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 복합적인 관계가 되기 위해서는 두 사람이 자기 자신의 그리고 상대방의 잠재력을 개발해야 한다. 잠재력의 개발을 위해서는 상대방에게 주의를 집중해서 상대방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으며, 어떤 감정과 꿈을 지니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것 자체가 끊입없는 하나의 과정이며, 평생을 통해 이루어야 하는 과제이다. 상대방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되면 함께 즐길 수 있는 일들이 많아진다. 함께 여행을 다니고, 같은 책을 읽고, 아이를 키우며, 계획을 세우고 실현해 나가는 모든 일들이 즐거워진다. 구체적인 세부 사항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각자가 그때그때 상황에 맞추어 조절해 가면 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기본 원칙을 지켜가는 것이다. 즉 인생의 다른 측면과 마찬가지로, 성도 우리가 적극적으로 통제하고, 복합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가꾸어 나간다면 즐거운 것이 될 수 있다.
* 산스크리트 어로 요가는 '함꼐 있게 함'을 의미하는데, 이는 사람과 신을 일체가 되도록 하는 요가의 목적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먼저 신체의 각 부분이 서로 하나가 되도록 하고, 그렇게 하나가 된 육체와 의식이 함께 질서를 찾아나가는 것이다. 약 1,500년 전에 파탄잘리에 의해 집대성된 요가의 교본에는 이러한 목표에 이르는 여덟 단계가 제시되어 있는데, 각 단계로 올라갈수록 난이도는 점차 증가한다. 윤리적 준비를 하는 처음 두 단계는 각 개인의 태도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이 단계는 의식을 정리흔 단계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정신을 직접적으로 통제하려는 노력을 시도하기 전에 우선 심리적 엔트로피를 최대한 줄이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 실천하기 위한, 첫 단계인 야마(yama)에서는 거짓말.도벽.욕망.탐욕 등 타인에게 해를 끼칠지도 모르는 생각과 행동을 자제하라고 한다.
두 번째 단계는 순종을 의미하는 니야마(niyama)이다. 이는 곧 청결과 수련 그리고 신에 대한 순종을 질서 정연한 일과를 따름으로써 예측 가능한 형태로 만들고, 이 과정을 통해서 주의를 통제하기 쉽게 만드는 것이다.
그 다음의 두 단계는 육체적 준비를 하는 단계로, 요기라고 불리는 수행자들이 감각의 유혹을 이겨내고, 지치거나 사념에 얽매이지 않고 집중할 수 있게 해주는 습관을 기르는 단계이다.
세 번째 단계에서는 아사나(asana)라고 하는 다양한 '좌자세'나, 동일한 자세를 오랜 시간 동안 긴장이나 피로에 굴하지 않고 유지하는 것이다. 우리는 천을 두르고 머리를 땅에 대면서 발은 목뒤로 접은 채 거꾸로 서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서양에 알려진 익숙한 요가 형태, 즉 아사나이다.
네 번째는 프라나야마(pranatama), 즉 호흡법으로서 신체의 긴장을 완화하고 호흡의 리듬을 안정시키는 것이 그 목적이다.
다섯 번째의 단계는 지금까지의 준비 운동과 본격적 요가 수행의 연결 단계로 프라트야하라(pratyahara)라고 한다. 이것은 감각정보 입력을 통제함으로써 외부 물체로부터 주의를 끊고 궁극적으로는 본인이 의식으로 받아들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도록 하는 단계를 말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단계들을 보면, 이번 장에서 설명하는 플로우 활동의 목적, 즉 의식 세계의 통제와 요가의 목적이 얼마나 유사한지를 할 수 있다.
나머지 세 단계는 지금 우리의 주제와 일치하지는 않지만-왜냐하면 나머지 단계에서는 육체적 기술보다는 순수한 정신 작용을 통한 의식의 통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여기서 맥락을 유지하기 위해, 또 결국에는 이런 정신적 수행이 이에 앞서 행해지는 육체적 수행에 전적으로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계속 설명하기로 한다. 다라나(dharana)는 오랜 기간 동안 단일한 자극 하나에만 집중하는 것으로, 앞 단계인 프라트야하라와 일맥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우선 사물을 의식 밖으로 내보내는 것을 배우고, 그 다음 그것을 의식에 대시 넣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고도의 명상을 수행하는 드야나(dhyana)가 일곱 번째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는 어떤 것으로부터도 방해받지 않고, 앞 단계에서와 같은 단일 자극도 필요치 않은 집중 상태에서 자신을 잊는 법을 배우게 된다. 최종적으로 수행자는, 명상하는 사람과 명상의 대상이 하나가 되는 상태인 사마디(samadhi)를 성취하게 된다. 사마디를 성취한 사람들은 이를 그들 생애에서 최고로 행복한 경험으로 묘사한다.
* 고전주의 시인 메난드로스..."우리 모두를 비추어 주는 태양, 별, 바다 , 구름 그리고 불꽃이야! 그대가 백 년을 살든 아니면 단 며칠을 살게 되든, 이보다 더 귀한 것을 볼 수는 없으리라."
* 삶의 질을 향상시켜 주는 것은 음악이 귀에 항상 가깝게 있다는 사실이 아니고, 우리가 주의를 집중해서 귀를 열고 들을 때만이다.
* 음악에 내재한 기뿜의 잠재성을 최대로 살리는 사람들은 그들의 겅혐을 플로우로 변화시킬 수 있는 나름대로의 방법을 알고 있다. 그들은 우선 일정한 시간을 음악 감상에 할애한다. 그 시간이 되면 불을 끄거나, 제일 좋아하는 의자에 앉거나, 혹은 주의를 집중할 수 있는 자신들만의 어떤 방법을 통해 집중도를 높인다. 그들은 감상할 음악을 미리 신중히 선곡하며,감상 시간에 맞는 구체적 목표를 설정해 둔다.
* 음악 감상은 처음에는 감각적 경험 단계에서 출발한다. 이 단계에서는, 우리 신경계에 유전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유쾌한 육체적 반응을 유발시키는 음색에 반을을 보인다. 우리는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그런 특정 가락이나, 플루트의 애조를 띤 호소, 또는 활달한 트럼펫의 곡조에 반응을 나타낸다. 우리는 특히 드럼이나 베이스의 리듬에 민감하게 반응을 하는데, 이런 리듬이 록 음악의 기초가 되는 것이며, 누군가는 이와 같은 리듬이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처음으로 듣게 되는 어머니의 심장 소리를 상기시켜 준다고 하기도 한다.
다음 단계는 유추적 감상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는 음의 양식에 따라 감정과 이미즈를 떠올리는 기술을 갖추게 된다. 음울한 섹소폰의 악절은 대평원 상공에서 먹구름이 몰려드는 것을 바라볼 때 느꼈던 경외감을 상기시켜준다. 또 차이코프스키의 곡은 눈이 가득 덮인 숲 속에서 종을 딸랑거리며 썰매를 타고 달리는 광경을 눈으로 보는 듯하게 해주기도 한다. 대중 가요도 물론 그 노래가 어떤 분위기와 어떤 이야기를 나타내는 곡인가를 가사로 명확히 알게 해줌으로써, 이와 같은 유추적 감상법을 최대로 활용한다고 하겠다.
음악 감상의 가장 복합적인 단계는 분석적 감상 단계이다. 이 단계이서는 음의 감각적 혹은 서사적 측면보다는 음악의 구조적인 요소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감상 기술이 이와 같은 수준이 되면, 그 작품 저변의 양식 및 그와 같은 화성을 이루어 낸 방법을 인식하는 능력을 갖게 된다. 이러한 수준의 감상 기술을 익히게 되면, 각 공연마다 상이한 음향의 질을 비교 평가할 수 있으며, 공연 작품을 그 작곡가의 초기 및 후기 작품과 비교하기도 하고, 동시대의 다른 작가가 만든 작품과도 비교할 수 있다. 또한 관현악단, 지회자, 악단의 초기 공연과 후기 공연을 비교해 보거나, 다른 악단과 지휘자는 같은 작품을 어떻게 해석했는지를 비교해 볼 수도 있다.
이처럼 분석적 감상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같은 블루스 곡을 다양하게 변화시킨 편곡 작품들을 서로 비교하기도 하고 "카라얀이 1975년에 지휘한 제7번 교향곡 제2악장이 1963년 공연 당시와 어떻게 다른가 한번 볼까?"라든지, "시카고 교향악단의 금관악기부가 베를린 교향악단보다 정말 더 나은가?"라는 생각들을 염두에 두고 감상을 하기도 한다. 그와 같은 목표를 설정해 놓았기 때문에 듣는다는 작업은 하나의 적극적인 경험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을 통해, "카라얀이 빠르기를 좀 늦추었네"라든지, "베를린 교향악단의 관현악부의 소리는 더 선명하지만 부르더운 맛이 좀 적군"등과 같은 계속적인 피드백을 얻는다. 이와 같은 분석적인 감상 기술을 익혀나가게 되면 음악을 즐길 수 있는 기회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 플라톤은...어린아이들에게 제일 먼저 가르쳐야 할 것은 음악이라고 믿었다.
* 토스카니니의 관현악단에서 제1바이올린을 연주했던 완벽주의자 아버지를 두었던 피아노 신동 로린 홀란더는, 어릴 적 혼자 피아노를 칠 때는 환희에 젖어 모든 것을 곧잘 잊어버리곤 하다가도 지나친 요구를 하는 엄격한 선생님들 옆에서는 공포에 떨었다고 한다. 그는 십대가 되었을 때 연주회 연습을 하다가 갑자기 손이 굳어져 몇 년 동안이나 꽉 쥐어진 손을 펼 수 없었다. 그의 의식 저변에 있던 어떤 잠재 의식적 기제가 발동해 계속적으로 부모의 비판을 들어야만 하는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홀란더는 심리적 원인으로 유발되었던 마비에서 벗어나, 다른 재능 있는 어린 연주자들이 음악 그 자체를 즐길 수 있도록 도와주는 데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면 살고 있다.
* 미각적 기뿜에 수반되는 위험성은-여기서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성행위와 마찬가지로-중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폭음.폭식과 호색이 일곱 가지 원죄에 포함되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초기 교회의 설립자들은, 육체의 환락에 지나치게 탐닉하면 심리 에너지가 고갈되어 다른 목표들을 등한시 하게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처럼 청교도들이 즐거움을 불신하게 된 이유는 만약 사람들이 유전적 욕구의 맛을 한번 보게되면, 그것을 점점 더 원하게 되어 이를 충족시키느라 다른 일에 할애되는 시간이 줄어들고 만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반드시 억제한다고 해서 덕이 되는 것은 아니다. 두려움 때문에 스스로를 억제하는 삶은 필연적으로 위축되게 마련이다. 그러한 사람들은 방어적이며 완고해지고, 자아가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다. 오직 자율적으로 선택한 규율을 통해서만, 인생을 즐기면서도 이성의 한도를 벗어나지 않을 수 있다. 만을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니라 스스로 원하기 때문에 자신의 본능적 욕망을 조절할 수 있다면, 중독되지 않고도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 몇몇 종교에서는 사람의 신체를 '신의 성전' 또는 '신의 그릇'이라고 은유적으로 표현...
인간이라는 유기체를 구성하는 서로 연결된 가가 세포와 기관들이 우리로 하여금 우주의 다른 존재와 접촉하게 해주는 하나의 도구가 된다는 것이다. 신체라는 것은, 경외로운 우주 공간에서 간으한 한 많은 정보들을 얻어 낼 수 있도록 정밀한 장치가 가득 장착된 탐사 로켓과도 같은 것이다....
우리의 육체는 감각 기관을 사용할 때마다 긍정적인 느낌을 만들어 우리 자신의 몸 전체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진화되어 왔다.
[The Flow of Thought]
* 프랜시스 베이컨이 400여 년 전에 언급한 바와 같이 지식의 씨앗이 되는 경이감이야말로 가장 순수한 형태의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다.
* 어떤 사람들은 악보를 읽는 기술이 너무나 뛰어나 실제로 연주를 들을 필요가 ㅇ벗으며, 따라서 듣는 것보다 오히려 교향곡의 악보를 읽는 것을 더 좋아하기도 한다. 그들은 머릿속에 있는 가상의 음이 어떤 실제 연주보다 훨씬 더 완벽하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하게, 미술 작품과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은, 그 작품들의 순수한 시각적 측면보다는 그 작품이 갖는 정서적.역사적.문화적 측면을 더 깊게 음미하곤 한다.
* 운동 선수들은 어느 한계 이상으로 그들의 성적을 향상시키려면, 먼저 정신을 가다듬는 법부터 익혀야 한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얻게 되는 내적 보상은 좋은 컨디션뿐만이 아니라 개인적 성취감과 자긍심의 강화까지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역으로, 모든 정신적 활동을 위해서 신체적 상태가 중요하다. 예를 들어 체스는 가장 두뇌를 많이 쓰는 게임 중의 하나이지만, 체스의 고수들은 달리기나 수영을 하면서 늘 체력을 다져야 한다. 그들이 육체적으로 건강하지 못하면, 체스 대회에서 장시간 동안 고도로 정신을 집중한 상태에서 오래 버티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요가에서는 육체적 기능을 통제하는 법을 먼저 습득함으로써 의식으 통제를 준비하며, 궁극에 이르러서는 의식과 육체가 자연스레 하나로 합쳐진다.
*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바와는 달리, 정상적인 정신의 상태는 카오스, 즉 혼돈 상태이다. 훈련을 받지 않고는, 그리고 외부 세계에 주의를 집중할만한 대상이 없이는 사람들은 한 번에 몇 분 이상 집중할 수 없다.
* 우리는 정신을 통제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이 얼마나 미약한지를 잘 깨닫지 못한다. 왜냐하면 습관에 의해 심리 에너지가 너무도 잘 배분되는 까닭에 거침없이 계속 이어지는 것처럼 보이기 떄문이다. 아침에 자명종 시계가 울리면, 우리는 잠에서 깨어 의식을 찾은 후 목욕탕으로 가서 이를 닦는다. 그러고 나면 문화가 규정해 주는 사회적 역할이 우리의 생각을 정리해 주며, 하루가 저물 떄까지 일정한 양식에 따라 자동적으로 행동하다가 밤이 되면 잠을 자면서 의식을 잃어버린다. 그러나 특별하게 할 일이 없는 상태로 혼자 남겨졌을 떄는 본능적인 무질서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다. 별로 할 일이 없으니 이것저것 생각해 보다가 대개는 뭔가 고통스럽고 신경 쓰이는 일에 생각이 멈춘다. 생각을 정리하는 법을 알지 못하는 한, 현재 가장 문제가 되는 일로 관심이 모아진다. 실제 혹은 가상의 고통이나, 최근에 유감스러웠던 일, 또는 오래된 갈등 등에 관심이 쏠린다. 이런 쓸모도 없고 즐겁지도 않은 엔트로피가 바로 정상적인 의식의 상태이다.
이런 상태를 피하기 위해 현재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정보로-그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머릿속을 채움으로써, 더 이상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가, 즐기는 것도 아니면서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막대한 시간을 텔리비전 보는 일에 소모하는가 하는 의문을 풀어준다. 독서나 다른 사람과의 대화 혹은 취미 활동과 비교해 볼때, 텔리비전은 심리 에너지를 최소한으로 투자하고도 쉽고 지속적으로 시청자들의 주의를 끌게 해준다.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동안은 골치 아픈 개인적 문제를 떠올리게 될까봐 염려할 필요가 없다. 일단 사람들이 정신적 혼돈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이런 미봉책을 쓰기 시작하면, 그 습관을 버리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 창의성과 기계적 암기가 양립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예를 들어, 가장 독창적이었던 과학자들의 상당수가 음악.시 또는 역사적 정보들을 광범위하게 외우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철학과 과학은 생각하는 일 자체가 즐거운 것이기 때문에 개발되고 계속 발전되어 왔다는 것이다.
* 위대한 사상가들에게는 언제나 물질적인 봇아보다는 사고하는 즐거움이 그 동기가 되어 왔다. 가장 독창적인 고대 사상가 중의 한 명인 데모크리토스는 고향 사람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데모크리토스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생각에 골몰하여 며칠씩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그들은 데모크리토스의 행동이 어딘지 잇아하며 아픈 것이 틀림없다고들 추측ㅇ르 했다. 그래서 그들은 위대한 의사인 히포크라테스를 보내 자신들의 현인이 어디가 아픈 것인지를 진찰해 보도록 했다. 훌륭한 의사였을 뿐 아니라 현명하기도 했던 히포크라테스는 데모크리토스와 삶의 불랍리에 대해 토론하고 난 뒤, 현인이 아픈 데가 있다면 그것은 그가 너무 정신이 온전하다는 것일 뿐이라고 마을 사람들을 안심시켜 주었다. 그는 미친 것이 아니라 생각의 플로우 속에 빠져 있던 것이다.
데모크리토스의 저서 가운데 아직도 남아 있는 단편들에는 사고를 통해서 얻는 보상을 그가 얼마나 즐겼는지 잘 나타나 있다.
"무엇인가 아름답고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실로 거룩한 것이다.", "행복이란 것은 힘이나 돈에 있는 것이 아니다 행복은 진실과 다양함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유쾌함과 자신감은 최고의 선이다."
다시 말해, 데모크리토스는 읫기을 통제하는 법을 익혔기 때문에 삶을 즐길 수 있었던 것이다.
* 단어를 사용해 우리 삶의 질을 고양시킬 수 있는 훨씬 더 실재적인 방법은, 오늘날에는 거의 잊혀진 '대화의 기술'이다....
"미묘한 대화, 그것이야말로 에덴 동산이다"라고 서술한 알리....대화의 주된 기능은 무엇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 글은 단지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보를 창조하기 위해 쓰는 것이다.
* 작업 중에 직면하게 되는 지적 수수께끼들을 풀려는 노력의 목표가 '정상'과학자들에게 연구의 동기를 주는 것이라면, '창의적' 과학자들 - 기존의 이론적 틀을 깨고 새로운 영역을 개철하는 과학자들-에게는 연구가 주는 즐거움 자체가 추진력이 된다. 그 좋은 예를 보여 준 사람이 전설적인 신화를 남긴 천체물리학자 찬드라세카이다. 그는 1933년 젊은 나이로 인도를 떠날 때, 캘커타에서 영국으로 가는 느린 배 속에서 훗날 블랙홀 이론의 기초가 된 천체진화의 모델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아이디어는 너무 생소한 것이어서 오랫동안 과학계에서 수용되지 못했다. 그후 그는 시카고 대학에 채용이 되었고, 이름이 알랴지지 않은 채로 자신의 연구를 계속했다.
찬드라세카가 자신의 일에 얼마나 충실했는지를 가장 잘 보여 주는 일화가 하나 전해지고 있다. 1950년대에 그는 위스콘신의 윌리엄스 베이라는 곳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곳은 시카고 대학의 천체 관측소가 위치한 곳으로 본교에서 약 128킬로미터 가량 떨어져 있었다. 그 해 겨울 학기에 그는 고급 천체물리학 세미나 한 과목을 강의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단 두명의 학생만이 수강 신청을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두 명을 위해 불편하게 통근을 하느니 차라리 폐강을 할 것으로 예쌍했다. 그러나 찬드라세카는 강의를 없애지 않고, 일주일에 두 번씩 시카고로 그 먼 시골길을 달려와서 강의를 하였다. 몇 년 후에 두 명의 학생 중 한 명이 노벨 물리학 상을 수상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후에 나머지 한 학생마저 같은 상을 탔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사람들은 교수님 자신이 정작 노벨상을 타지 못한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동정적인 어조로 말을 맺곤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유감스러워 할 필요가 없었다. 바로 찬드라세카가 1983년에 노벨상을 수상했기 때문이다.
* 코페르니쿠스는 폴란드의 프라우엔부르크에 있는 한 성당의 회원으로 있을 떄 그의 획기적인 지동서릉ㄹ 완성시켰다. 천문학 연구는 교회에서의 그의 경력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으며, 그의 인생 대부분에서 그에게 보람을 주었던 것은 심미적인 것-부담스러운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에 비해 그만의이론에서 우러나오는 단순미-이었다. 갈릴레오는 의학 공부를 했지만 점차로 위험해졌던 실험을 계속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은, 다양한 고체의 중력 중심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가와 같은 의문점을 풀어가면서 느꼈던 기쁨 때문이었다. 뉴턴이 대발견을 했던 시기는 그가 1665년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학사 학위를 받은 직후였는데, 바로 그 해에 역병 때문에 대학이 잠시 문을 닫게 되었다. 뉴턴은 하는 수 없이 2년 동안 안전한 시골 휴양지로 피신해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게 되었는데, 그 무료함을 만유인력이라는 아이디어를 생각하면서 달랬던 것이다.
근대 화학의 창시자라 불리는 라부아지에는 현재의 국세청에 해당하는 공공 기관에서 일하던 공무원이었다. 그는 또한 농경 개혁과 사회 계획에도 관여하고 있었지만, 그가 가장 즐겼던 일은 바로 우아하고도 정밀한 그의 실험이었다. 근육과 신경이 전기를 어떻게 전도하는가에 관한 기초 연구를 하여 후에 전지 발명의 기반을 구축한 갈바니는 평생 동안 의원을 개업하고 있던 내과 의사였다. 멘델은 성직자였는데, 유전학의 기반이 된 그의 실험들은 취미로 원예를 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노벨 과학상을 수상한 마이컬슨이 말년에 이르러 그처럼 많은 시간을 빛의 속도를 측정하는 데 바친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자, "너무나 재미가 있었거든요"라고 대답을 했다. 또한 아인슈타인이 그의 가장 유명한 논문을 쓴 시기는 그가 스위스 특허청에서 사무원으로 근무할 때였음도 잊지 말자. 이러한 학자들이나 우리가 흔히 거론하는 많은 위대한 과학자들에게는, 그들이 각 분야에서 '전문가'도 아니고 대대적 지원을 받는 명망 있는 인물도 아니었지만 아이디어를 생성하는 데 어떠한 장애물도 없었다. 그들은 그저 자신들이 하는 일을 즐겼을 뿐이다.
* 전문화는 어떠한 사상이든 그 사고의 기이를 더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지만, 여기서 목적과 수단의 관계를 분명하게 해야 하겠다. 즉 전분화는 한층 더 깊은 사고를 위해서 하는 것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라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많은 진지한 사상가들이 그들의 모든 정신적 노력을 투자해 명망 있는 학자가 되지만, 그러는 과정에서 학자가 된 본래의 목적은 망각하고 만다.
* 육체적.정신적 활동에 전념하는 정도에 대한 우리의 적잖이 왜곡된 태도를 잘 반영해 주는 두 단어가 있다. 이것이 바로 '아마추어(amteuer)'와 '애호가(dilettante)'라는 명칭이다. 오늘날에는 이러한 호칭이 다소 전문가들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능력을 지닌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처럼 와전이 되었다. 그러나 원래 '아마추어'란 말은 라틴어의 'amare', 즉 '사랑하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것으로, 자신이 하는 일을 사랑하는 사람을 의미한 것이었다. 이와 유사하게, '애호가'도 '~에서 즐거움을 찾는다'라는 라틴어 'delectare'가 그 어원으로서, 특정 활동을 즐기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두 단어의 본래 뜻은 성취보다는 경험에 좀더 비중을 두는 것이었으며, 개인이 얼마나 많은 성취를 하는가보다는 어떤 일을 하는 과정에서 얻게 되는 주관적 보상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 두 단어의 운명만큼 경험 자체의 소중함에 대한 우리의 태도 변화를 극명하게 나타내 주는 것은 없다. 아마추어 시인이나 과학 애호가가 됨으로써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이들이 존경을 받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점차로 경험의 질보다는 성공.성취.성과의 질 등 행동의 결과가 훨씬 많은 경탄의 대상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애호가가 되면 가장 중요한 것, 즉 특정 활동이 주는 기쁨을 성취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애호가라 불리면 적잖이 난처한 입장에 놓이는 아이러니가 생긴 것이다.
* 많은 사람들이 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배움을 포기하는 이유는, 13~20년에 걸친 교육이 외적 동기에 의해 주어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즉 배운다는 것이 불유쾌한 기억으로 자리접고 있는 것이다. 학생들의 주의력이 오랜 기간 동안 외부에 의해, 즉 교과서와 교사들에 의해 조종되어 왔기 때문에 그들은 졸업을 첫 자유의 날로 간주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상징적 기술의 사용을 포기하는 사람은 결코 자유로워 질 수가 없다. 그의 사고는 이웃의 의견이나 신문의 사설 그록 텔레비전에 의해 좌우될 것이다. '전문가'의 조종을 받게 되는 것이다. 외적 동기에 의한 교육이 종결되는 시점을 내적인 동기로 교육을 받게 되는 출발점으로 만드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Work as Flow]
* 고도의 기술을 요하며 자율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은 자아의 복합성을 높여 주는 반면, 강제되는 상황에서 행해지는 비숙련 작업만큼 엔트로피적인 일도 드물다
* "자신의 일을 찾은 이들은 복 있는 사람들이다. 그 이상의 축복은 요구하지 말자"라고 한 토마스 칼라일의 서술...
프로이트...행복의 요소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받자 그는 '일과 사랑'이라는 간략하면서도 매우 재치있는 대답을 했다.
* 일상의 생산 활동이 플로우 경험과 최대한 유사해질 수 있도록 진화가 이루어진 문화도 더러 있다. 일과 가정 생활이 어렵기는 하지만 조화롭게 통합이 된 그룹들이 있는 것이다. 유럽의 고산 지대와 산업혁명의 영향을 받지 않은 알프스의 마을들에 이러한 유형의 지역 사회가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 '전통적 환경' - 몇 세대 전까지만 하더라도 전 세계적으로 우세했던 농경 생활 방식으로 대표되는 - 에서 노동이 어떻게 경험되어지는가를 알아보고자 마시미니 교수와 파베 박사가 이끄는 이탈리아의 심리학 연구 팀이 최근 그 지역의 일부 주민들과 인터뷰를 한 바 있다. 여기서 그들의 연구 결과를 잠시 소개해 보고자 한다.
그 지역 거주민들이 보여 주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일과 자유 시간의 차이를 거의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하루에 16시간씩 노동을 한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전혀 일을 하지 않는다고도 말할 수 있다. 주민 가운데 한 명인 76세의 세라피나 할머니는 이탈리아 알프스의 폰트 트렌타츠라는 작은 부락 출신이다. 할머니는 아직도 아침 5시에 일어나 소젖을 짠다. 그러고 나서는 많은 양의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집안청소를 한다. 할머니는 다시 밖으로 나가 날씨와 절기에 따라 소떼를 빙하 바로 밑에 있는 초목 지대로 몰고 가거나, 과수원일을 하거나, 혹은 양털을 빗질한다. 여름에는 높은 곳에 위치한 목초지에서 건초를 자르면서 몇 주씩 보내다가, 가대한 건추 꾸러미를 머리에 이고 몇 마일을 걸어서 헛간까지 내려온다. 곧장 헛간으로 향한다면 반 시간이면 다다를 거리이지만, 이 할머니는 경사지가 마모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구불구불한 길을 선택해 다닌다. 저녁에는 책을 읽거나 증손자들에게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한다. 또한 일주일에 몇 번씩 자신의 집에 모이는 친척들이나 친구들의 파티에서 아코디언을 연주하기도 한다.
세라피나 할머니는 나무 한 그루, 돌멩이 하나 그리고 산의 모든 특징들에 이르기까지 마치 자신의 오랜 친구인 양 속속들이 알고 있다. 수세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가문의 전설이 그 정경에 얽혀 있다. 1473년의 역벙이 휩쓸고 지나간 다음, 할머니의 마을에서 유일한 생존자였던 한 여인이 손에는 횃불을 들고, 지금의 그 낡은 돌다리에서 계곡 아랫마을의 유일한 생존자가 된 한 남자를 만났다. 그들은 서로를 도왔으며 결혼을 했고, 그래서 현재 할머니 가족의 조상들이 되었다. 또 세라피나 할머니의 증조할머니가 어렸을 적에 길을 잃은 곳도 바로 이 라즈베리 밭이었다. 극심한 눈보라가 몰아치던 해에는 바로 이 바위 위에서 악마가 갈퀴를 들고 할머니의 삼촌을 위협했었다.
인생에서 가장 재미있는 일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자 세라피나 할머니는 즉각, 소젖을 짜는 일, 소떼를 목초지에 몰고 가는 일, 과수원에서 가지치기를 하는 일, 양철을 빗질하는 일...등을 대었다. 사실상 할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일들은 평생 동안 자신이 줄곧 하온 일들이었다. 할머니는 자신의 일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그 일들은 제게 큰 만족을 줍니다. 집 밖에 나가는 것,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 동물들과 함께 있는 것... 나는 모든 것들과 이야기를 합니다. 꽃.나무.새 그리고 동물들 모두와 말이죠. 자연의 모든 것들이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매일같이 자연의 변화를 느끼게 되죠. 그러면 상쾌하고 행복한 기분에 젖게 됩니다. 당신들이 이곳에 싫증을 내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유감일 뿐이죠...일을 많이 해야 하더라도 이곳은 모든 것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만약 돈과 시간이 넘치도록 많다면 무엇을 하고 싶냐는 질문을 받자 세라피나 할머니는 웃고 나서는 똑같은 활동들을 쭉 열거했다. 즉 소젖을 짜고, 소떼를 목초지로 몰고 가고, 과수원을 돌보고, 양털에 빗질을 하는 일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도시 생활의 편의들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가끔씩 텔레비전도 보고, 신문도 읽으며, 많은 친척들이 대도시에 살면서 자동차와 전기 기구, 해외 여행 등 편리한 생활을 누리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멋지고 현대적인 생활 방식도 세라피나 할머니에게는 별 매력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그녀는 이 우주 속에서 자신의 역할에 너무도 만족하며, 고요한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있다.
폰트 트렌타츠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66~82세에 이르는 열 명의 노인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을 때도 그들의 응답은 한결같이 세라피나 할머니의 대답과 유사했다. 노동과 여가 시간을 정확하게 구별 짓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그들 모두는 노동이 최적 경험을 하게 해주는 원천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만약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도 일을 덜하고 싶다고 대답한 사람 역시 아무도 없었다.
그들의 자녀들과 인터뷰를 했을 때 자녀들 대부분도 역시 삶에 대한 유사한 태도를 보여 주었다. 그러나 20~33세의 나이에 해당하는 그들의 손자들은 노동에 대해 다른 태도를 보여 주었다. 즉 기회만 된다면 일으 더 적게 하고, 더 많은 시간을 독서.운동.여행.최신 쇼 관람 등의 여가 활동에 쓰겠다는 응답을 했다. 이처럼 세대간에 차이가 나타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연령이다. 대체로 젊은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에 대해 만족하기보다는 변화를 갈망하고, 반복되는 일상의 제약을 참기 어려워한다. 이 세대간 차이는 또한, 노동이 사람들의 정체성 및 궁극적 목적과 의미 깊게 연관되어 있던 전통적 생활 양식의 쇠퇴를 만영해 준다고도 볼 수 있다. 폰트 트렌타츠 마을의 젊은이들 중 일부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차 세라피나 할머니와 비슷한 노동관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마 그렇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꼭 필요는 하지만 불유쾌한 일과 즐겁기는 하지만 복합적이지 못한 여가 활동 사이의 격차를 계속 넓혀 갈 것이다.
알프스 마을 사람들의 생활이 쉬웠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매일매일을 생존해 나가기 위해서는 고된 단순 노동에서부터 기술이 필요한 수공예.독특한 언어.노래.예술품과 같은 복합적인 전통을 계승 발전시키는 일까지 광범위한 분야를 숙달해야만 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이 문화는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이 그러한 일을 즐기는 방향으로 진화되어 왔다. 이들은 고된 노동을 해야만 하는 현실에 우울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자유롭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나 할 수 있으니까요. 내가 만일 어떤 일을 오늘 안 하면, 내일 하면 됩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죠. 나는 여태껏 내 자유를 지켜왔고, 이 자유를 위해서 싸워왔습니다."라는 74세의 한 할머니의 말에 모두 동의를 한다.
* 조는 시카고 남부의 열차 부품 조립 공장에서 일하는60대 초반의 용접공이었다. 그는 약 이백 명의 동료들과 함께 마치 거대한 격납고처럼 생긴 어두운 건물 안에서 일을 했다. 그곳은 무수한 불꽃이 튀는 가운데 몇 톤씩 나가는 강철판들이 머리 위의 트랙에 매달려 움직여 다니며 화물 열차의 차축에 용접되어지는 곳이었다. 또한 여름이면 찜통이 되고, 겨울에는 북미 대초원의 살을 에는 바람이 윙윙거리며 불어대는 곳이었다. 쇠붙이가 쨍그렁 울리는 소리가 너무나 커서 다른 사람에게 얘끼를 하려면 귀에다 대고 소리를 질러야 했다.
조가 미국에 온 것은 다섯 살 때였고, 4학년 때 학교를 중퇴했다. 그는 이 공장에서 일을 한 지가 벌써 30년이 넘었지만 십장이 되길 원한 적은 단 한번도 없다. 자신은 단순한 용접공으로 남아 있고 싶으며, 다른 사람의 상관이 된다는 것이 불편하다면서 몇 번에 걸친 승진 제의를 거절했다. 그는 공장에서 제일 낮은 직급에 있었지만, 누구나 조를 알고 있었으며, 그가 이 공장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는 사실에는 모두가 동의를 하였다. 공장장은 만약 조와 같은 사람이 다섯 명만 더 있어도 그 공장은 업계에서 가장 효율적인 공장이 될 것이라 했다. 그의 동려 노동자들도 만약 조가 없다면 당장이라도 공장의 문을 닫아야 할 것이라고 했다.
조가 이처럼 유명해진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공장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작업에 완전히 숙달이 되어서, 어떤 사람의 작업일지라도 필요한 때면 언제든지 대신해서 일을 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는 거대한 기중기로부터 작은 전자 모니터에 이르기까지 고장난 기계는 그 종류를 막론하고 모두 고칠 수 있었다. 그러나 가장 놀라운 점은 조가 이런 일들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런 일을 매우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어떤 정식 교육도 받지 않았는데 어떻게 복잡한 엔진과 기구들을 다룰 수 있게 되었냐는 질문을 받자 조는 명쾌한 대답을 했다. 어릴 적부터 그는 모든 종류의 기계에 매료되어 왔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제대로 작동을 하지 않는 기계에 흥미를 느꼈다고 한다.
"우리 어머니의 토스터가 고장이 났을 때 저는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해봤습니다. '만일 내가 토스터인데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면 나의 어디가 잘못된 것일까?'라고 말입니다."
그러고 나서는 토스터를 분해해서 결함을 발견하고, 그것을 고쳤다고 한다. 그 이후로 그는 계속 이와 같은 감정 이입적 의인화 방법을 통해 더욱 복잡한 기계 체제에 관해 배우고 수리를 했다. 새로운 발견이 주는 매력은 아직도 조를 사로잡고 있어서 이제 은퇴가 가까워졌음에도 그는 아직 매일같이 일하는 것을 즐긴다.
조는 공장에서 어려운 일을 수행한다는 사실에 의존해 자기 만족을 얻는 일 중독자는 결코 아니었다. 별 의미도 없는 일상적인 일을 복합성을 가지는 일로 바꾸는, 즉 플로우를 이끌어 내는 활동으로 변화시키는 그의 능력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가 집에서 하는 일들이다. 조와 그의 아내는 시카고 외곽 지역의 수수한 방갈로(베란다가 붙은 목조 단층집-옮긴이)에서 살고 있었다. 몇 해에 걸쳐서 그들은 집 양쪽 면에 접해 있는 공터를 사들였다. 이 공터에 그는 테라스도 있고, 길도 나 있으며, 수백 종의 꽃과 관목이 있는 정교한 바위 정원을 만들었다. 땅 속에 스프링클러를 장치할 때 조는 한 가지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다. 만약 물이 뿜어지면서 무지개를 만들도록 장치하면 어떨까? 여러 개의 스프링클러로 실험해 본 결과 아 목적에 합당할 만큼의 미세한 안개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선반을 가지고 스프링 클러 꼭지를 자신이 직접 디자인해 만들었다. 그는 이제 퇴근 후 정원 앞에 앉아 스위치 하나만 누르면 십여 개의 물줄기가 뿜어지면서 형성하는 작은 무지개를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조의 이 작은 '에덴 동산'에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는 거의 매일 일을 했기 때문에, 그가 집에 돌아올 때쯤에는 이미 해가 너무 기울어 물위에 영롱한 색채가 수놓아지는 것을 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원점으로 다시 돌아가 연구를 한 끝에 놀라운 해결책을 만들어 냈다. 즉 무지개를 만들기에 충분한 만큼의 태양 스펙트럼을 내포하는 조명등을 찾아내서 그것을 스프링클러 주변에 눈이 띄지 않도록 설치하는 것이었다. 이제 그는 완벽한 준비가 되었다. 한밤중일지라도 스위치 두 개만 누르면 그의 집 주변은 물줄기와 빛과 색채로 가득 차게 되는 것이다.
조는 '자기 목적적 성격'을 갖는 사람이 어떠한가를 보여 주는 드문 예이다. 다시 말해, 거의 비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는 작업장이나, 잡초가 무성한 도시 빈민가와 같은 가장 황폐한 환경에서도 플로우 경험을 창조해 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 중 한 명인 것이다. 조가 일했던 열차 부품 공장을 통틀어서 행동의 기회를 파악할 수 있는 통찰력을 가진 사람은 조 단 한 명뿐인 듯했다. 우리가 인터뷰한 나머지 용접공들은 모두 자신들의 직업을 가능하면 빨리 벗어나고 싶은 부담으로 여겼다. 이들은 매일 저녁 일이 끝나자마자 공장의 주변 곳곳에 우후죽순처럼 위치하고 있는 술집에 모여 맥주와 동지애로서 지루했던 하루를 잊으려 한다. 그러고 나면 집에 가서 텔레비전 앞에 앉아 맥주를 좀더 마시다가 아내와 옥신각신 사소한 다툼을 하고 나면 하루가 저물어 버린다. 모든 면에서 이들은 서로 비슷한 일과를 보내는 것이다.
* 도교의 학자인 장자의 저술 소겡 언급된 유(游)의 개념이다. 유는 도를 따르는 올바른 길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것은 영어로 '방랑(wandering)', '땅을 밟지 않고 걷기(walking without touching ground)', '수영하기(swimming)', '날기(flying)', 혹은 흐르기(flowing)' 등으로 표현할 수 있다. 장자는 유가이며, 완전한 헌신의 삶, 즉 간명하게 말하자면 완전한 자기 목적적인 경험을 의미하는 것이다.
* 경영진은 생산성에 최우선의 관심을 두고, 노동 조합의 간부들은 안전과 직업의 보장 그리고 보상 문제에 가장 관심을 쏟는다. 근시안적으로 보면 플로우를 창출하는 조건은 이러한 우선 순위와 대치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이 진정으로 그들의 일을 즐기게 되면, 개인적으로도 행복할 뿐만 아니라, 틀림없이 노동 생산성도 향상되어 현재 우선시되고 있는 다른 묙표들까지 한결 효율적으로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만일 모든 직업이 게임처럼 된다면 모든 사람들이 재미를 느낄 것으로 기대하는 것도 잘못된 생각이다. 가장 바람직한 외적 조건일지라도 그것이 반드시 플로우 경험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최적 경험은 행동의 기회에 대한 주관적 평가와 개인의 능력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다. 따라서 좋은 조건의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불만을 느끼는 경우가 흔히 발생하는 것이다.
* 직장에서는 일이 플로우를 제공해 주는 경우에도 일에 대한 동기가 낮은 편이고, 반대로 여가 활동 중에는 경험의 질이 낮음에도 불구하고 동기는 높았다
* 일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감각이 내리는 판단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은 직접 경험의 질은 무시해 버리고, 일에 대한 깊은 문화적 고정관념에 의거해 자신의 동기를 결정 짓는다. 일이란 부담이고 구속이며 자ㄱ신의 자유에 대한 침해이기 때문에 가능한 한 피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무감각하게되는 것은 심신이 지쳐서가 아니다. 문제는 현대의 노동자들이 자신의 직업과 그 직업에 관련된 목표를 인식하는 방법에 있는 듯하다.
자신이 원하지도 않는 과업에 노력을 투자하고 있다고 느끼면, 그것은 심리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우리 자신의 목표 달성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우리에게 부과된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과업에 투자되는 시간은 우리의 일생에서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을 그만큼 감소시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직업을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것으로, 외부로부터 강제된 부담으로, 그리고 인생의 큰 부분을 앗아가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일을 하는 도중에 순간적으로 긍정적인 경험을 하더라도, 그것이 자신의 장기적 목표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리 큰 의미를 두지 않는 경향이 있다.
* 불만족의 첫번째 원인은 다양성과 도전감의 결여이다.
두번째 불만은 직장어서 겪는 다른 사람과의 갈등, 특히 상관과의 갈등이다.
세번째로는 심신의 소모가 지적되었다.압력과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자신을 위한 시간이 너무 없다는 것, 그리고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 역설적이게도 일은 여가 시간보다 더 즐기기 쉽다. 왜냐하면 직업은 플로우 할동과 마찬가지로 자체 안에 목표가 있고 피드백.규칙.도전 등을 갖추고 있어서 당사자로 하여금 일에 더욱 열중하고, 그 가운데서 자신을 잊고 몰입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반면에, 여가 시간은 일정한 틀이 없기 때문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만 즐거운 것으로 만들 수 있다. 기술이 필요한 취미 활동, 목표와 한계를 정해 주는 습관, 개인적 관심사 그리고 특히 내적 훈련 등은 여가 활동 본연의 목적인 재창조(recreation)를 성취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사람들은 일하는 시간보다 오히려 여가 시간에 즐길 수 있는 기회를 놓쳐 버리는 수가 더 많다.
* 브라이트빌은 "미래는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의 것을 뿐 아니라, 여가 시간을 현명하게 활용하도록 교육받은 사람의 것이 될 것이다"
[Enjoying Solitude and Other People]
* 문자 사용 이전의 많은 문화에서는 고독을 정녕 견디기 함든 것으로 여겨 사람들은 혼자가 되지 않으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 '살아 있음'을 나타내는 라틴어는 'inter hominem esse'로 글자 그대로 '사람들 사이에 있음'을 의미한다. 반면, '죽다'라는 표현은 'inter homminem esse desinere'로서 '더 이상 사람들 사이에 있지 않다'라는 의미이다.
* '바보(idiot)'...그리스어 어원으로 '사적인 사람', 즉 다른 사람으로부터 배울 수 없는 사람을 뜻한다.
* 습관적 마약의 사용으로부터 끊임없는 집안 청소, 충동적 성행위에 이르는 다양한 강박적 행위들에 의존해 고독의 두려움을 벗어나 보려는 극단적 방법도 있다.
* 집중이 필요하고 기술을 증진시켜 주며 더 나아가 자아를 성장시켜 주는 활동을 하면서 자유 시간을 보내는 것과 텔레비전을 보거나 마약을 하면서 남는 시간을 때우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전자는 성장으로 이끌어 주고, 후자는 정신이 이상해지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할뿐이라는 점에 그 차이가 있다.
* 혼자 있는 시간으로부터 도피하지 않고, 그 시간을 활용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특히 젊은 시절에 더욱 중요하다.
* 혼자 있을 때 주의력을 통제하지 못하는 살마이라면, 결국 마약.오락.재미 등과 같이 정신을 둔화시키거나 주의를 돌려줄 수 있는 손쉬운 외적 해결책에 의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대응 방법은 퇴보적인 것이어서 발전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인생을 즐기면서도 발전할 수 있는 길은, 불가피한 삶의 조건인 엔트로피로부터 한층 더 고차원적인 형태의 질서를 창조해 내는 것이다.
* 혼자 있는 것을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는 할 수 없는 목표들을 성취하는 기회로 여긴다면, 그 사람은 외로움을 느끼지 ㅇ낳고 오히려 고독을 즐기게 될 것이다. 또 그 과정에서 새로운 기술을 습득할 수도 있다.
* 고독을 즐기는 법을 배우지 않는 한, 생의 많은 부분이 그 부작용을 회피하려는 필사적인 노력으로 점철되고 말 것이다.
* 키케로는 인간이 완전히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일련의 법규의 노예가 되어야만 한다고 저술한 바 있다. 다시 말해, 제약을 받아들이는 일이 곧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 우리 시대의 가장 기본적인 착오 가운데 하나는, 가정 생활은 저절로 꾸려지는 것이며, 가정 문제를 다루는 최선의 전략은 문제들이 해소될 때까지 그저 느긋하게 기다리면 된다는 생각이다....
가정도 다른 어떠한 공동조직과 마찬가지로 그 존속을 위해서는 지속적인 심리 에너지의 투자가 필요하다
* 불행하게도 공적인 분야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이 높은 복합성을 가진 행위를 하지 못하고 있다. 정치가들은 권력을 좇으며, 박애가들은 명예를 추구하고, 성자가 되려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정의로운가를 증명하려 한다. 이러한 목표들은 충분한 에너지만 투자한다면 성취하기가 그리 어려운 것들이 아니다. 한층 더 위대한 도전은 자기 자신에게 득이 될 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것들이다. 정치가들이 실제로 사회 상황을 변화시키고, 박애가들은 곤궁한 사람들을 도우며, 성자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삶의 전형을 제시하기란 매우 어렵겠지만 그만큼 보람도 큰 일이 될 것이다.
[Cheating Chaos]
* 밀라노 대학의 마시미니 심리학과 교수는 극단적인 장애에도 불구하고 플로우를 성취한 사람들에 관한 놀라운 사례를 수집하였다. 마시미니 교수 연구 팀에 참여하였덙 한 그룹은 대체로 과거에 사고를 당해 다리를 못쓰게 된 하반신 불구의 젊은이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조사에서 발견한 놀라운 사실은 그들 대다수가 하반신을 불구로 만든 사고를 일생에서 가장 부정적이면서도 도 가장 긍정적인 사건으로 언급하였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고 피해자들이 비극적인 사건을 긍정적으로 여길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상충되고 불필요한 선택을 줄이고 매우 분명한 목표들에만 집중을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장애인이 되어 직면하게 된 제한적 상황에 맞추어 새로이 설정된 목표들을 이루어 나가면서 이들은 그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명확한 목적 의식을 느꼈다고 한다. 살아가는 법을 다시 배우는 것 자체가 즐겁고 자랑스러운 일이었으며, 그들은 엔트로피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사고를 오해려 내적 질서를 확립시키는 계기로 삼을 수 있었다.
* 밀라노 대학 연구 팀의 조사 대상이 된 또다른 그룹은 선천적으로 눈이 멀었거나 혹은 후천적으로 실명을 하게 된 수십 명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인터뷰를 통해 다시 한번 얻게 된 놀라운 사실이 있다. 즉 많은 사람들이 시력 상실을 자신의 삶을 풍부하게 해준 긍정적인 사건으로 진술했다는 것이다.
* "...모든 사람들에게는 각자의 운명이 있으며, 우리 모두는 속담에 나오는 사자를 닮아야 합니다. 사자가 영양떼를 사냥할 때는 한 번에 단 한마리만 잡을 수 있을 뿐입니다. 저도 그렇게 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 "2주가 지나면 자신이 교수형에 처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정신을 놀라울 정도로 집중할 수 있다"라고 존슨이 말한 바 있는데...
* 불행을 당했을 때 그것을 오히려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을 수 있는 것은 아주 드문 재능이다. 이러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생존자'라 하며, '오뚜기 정신' 혹은 '용기'가 있는 사람들이라고 일컫는다. 우리가 그들을 어떻게 부르든 간에, 그들은 크나큰 난관을 극복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좌절하고 말았을 난관들을 뛰어넘은 특별한 살마들이다. 사실, 보통 사람들에게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하고 그 이유를 물었을 때, 응답자들은 용기와 난관 극복 능력을 우선으로 꼽았다. 베이컨이 스토아 학파 철학자인 세네카의 말을 인용해 남긴 "번창하는 사람은 부러움ㅁ을, 그러나 역경을 이겨내는 사람은 존경을 받는다"라는 말은 이 같은 사실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이들은 반대와 장애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확고히 지켜나간 사람들인 것이다. 그들은 용기, 또는 인간을 뜻하는 라틴어 'vir'에서 유래된 단어인 '덕망(virtue)'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모든 미덕 중에서, 역경을 즐거운 도전으로 변화시키는 능력만큼 유용하고, 생존에 필수불가결하며, 삶의 질을 향상시켜 줄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은 없기 때문이다.
* 인도 출신의 젊은 수학의 귀재 라마누잔은 정신 에너지를 수(數) 이론에 너무도 집중적으로 투자한 나머지 빈곤이나 질병, 고통, 심지어는 빠르게 다가오는 죽음조차도 그의 정신을 분산시키지 못했다. 오히려 그러한 난관들은 그의 창의력을 더욱 북돋아 주었다. 죽음을 맞이하는 침상에서도 그는 자신이 발견한 방정식의 묘미에 대한 경탄을 멈추지 않았으며, 그가 가졌던 마음의 평정은 그가 사용한 질서 정연한 상징들 속에 잘 나타나 있다.
* 스트레스 때문에 약해지는 사람도 있는 반면, 오히려 그것으로부터 힘을 얻는 사람도 있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기본적으로 그 해답은 간단하다. 희망이 없는 상황을 통제 가능한 새로운 플로우 활동으로 변화시킬 줄 아는 사람은 매사를 즐길 수 있으며, 고난을 겪음으로 인해 더욱 강해질 수 있는 것이다.
* 로건은 혹독한 육체적 고난을 이겨낸 사람들(남극 지역을 외롭게 헤쳐나가는 탐험대나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에 관해 연구했따. 그 결과 자신의 운명은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절대적 신념을 이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이들은 자신이 가진 능력으로 과연 운명을 개척해 나갈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한번도 품은 적이 없다....
자신을 더 이상 환경에 대립되는 세력으로 간주하지 않는 사람, 즉 자신의 목표와 의도하는 바만이 다른 어떤 것보다도 우선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린 사람만이 비로소 이와 같은 자세를 견지할 수 있다.
* 주된 관심이 내부로 향해 있고 걱정거리와 자아의 욕구에만 온 심리 에너지를 쏟는 한, 주변 환경에 관심을 갖기란 어려운 일이다. 스트레스를 즐거운 도전으로 변화시킬 줄 아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거의 없다.... 관심의 초점은 역시 개인의 목표에 의해 설정되지만, 이들은 자신의 목표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외적 사건들일지라도 그것을 주목하고 그에 맞게 적응을 해나갈 만큼의 개방적인 융통성을 지니고 있다.
* 관심의 초점이 자아가 아닌 다른 곳으로 돌려진다면, 충족되지 못한 욕구로 인한 좌절이 의식을 침해할 가능성이 그만큼 줄어드는 것이다.
* 자의식 없는 자신감을 갖고 주변 환경에 대해 언제나 깨어 있으면서 그 안에서 융통성 있게 대처하면 해결책이 나올 가능성이 큰 것이다.
* 역경을 즐어움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외적 요인들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님...
'자기 목적적 자아'의 소유자는 위협의 소지가 되는 요인들을 즐거운 도전으로 쉽게 변화시킬 수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쉽사리 권태를 느끼지 많고 좀처럼 근심 걱정에 얽매이지 않는다. 도 주변의 상황에 늘 깨어 있으면서 대부분의 시간 동안 플로우를 경험한다. '자기 목적적 자아'라는 용어는 글자 그대로 '스스로 만들어 낸 목적을 가지고 있는 자아'를 의미한다....대부분의 사람들의 목표는 생물학적 욕구와 사회적 통념에 의해 형성되어지므로, 자기 자아에서 발현된 목표들이 아닌 것이다.
* 목표와 도전을 달성하기 위한 일련의 행동 체계가 규정되면, 그 체계 안에서 필요한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행동의 결과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즉 피드백을 관찰해야 하는 것이다....
자기 목적적 자아를 가진 사람은 자신이 어떤 목표를 추구하고 있든 그 목표를 선택한 사람이 바로 자기 자신이란느 점을 잘 알고 있다...
스스로 내린 결정이라는 점을 주지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목표에 더욱 충실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사람의 행동은 믿을 수 있으며, 스스로 통제된다.
* 자기 목적적 성격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에 깊이 몰입한다. 전 세계를 무착륙으로 비행하든, 아니면 저녁식사 후 설거지를 하든지 간에 현재 하고 있는 눈앞의 일에 관심을 집중하는 것이다.
* 집중을 하면 몰입을 하게 되며, 이와 같은 몰입은 지속적인 주의력의 투입이 있어야만 유지될 수 있다.
* 이러한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에 관해 걱정을 하는 대신 온 마음으로 자신의 목표에 전념할 수 있다. 너무 깊이 몰입을 한 나머지 자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이와는 반대로 자의식이 별로 없기에 깊은 몰입이 가능한 경우도 있다.
* 세상을 전적으로 자신의 자아가 감당할 수 있는 협소한 창으로만 파악하는 것은 스스로를 제한하게 된다.
* 정신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은 글자 그대로 어떤 일이 발생한다 하더라도 그 일이 즐거움의 원천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통제력을 얻기 위해서는 결의와 훈련이 전제되어야 한다. 최적경험은 향락적이거나 안일한 삶의 자세로는 결코 얻을 수 없다. 긴장이 풀린 자유 방임적 태도도 혼란에 대한 충분한 방어가 되지 못한다.
[The Making of Meaning]
* 하나의 활동에서 플로우를 성취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 플로우가 평생동안 지속되지는 않는다...
*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전기 기술자.비행기 조종사.사업가.교사 등의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우디 아라비아와 그 외 아랍 산유국들 출신의 몇몇 회교도들과 잘 알게 되었다. 나는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심한 곤경에 처해 있는 상황에서도 그들 대부분이 느긋한 자세를 보일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질문을 하자 그들은 한결같이 다음과 같은 요지의 답변을 했다.
"별거 아니에요. 우리는 우리의 삶이 신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크게 동요하지 않습니다. 신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우리는 그것을 그저 받아들일 뿐이랍니다."
* 자신의 삶이 의미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은, 대체로 그들의 모든 에너지를 다 차지할 만큼 어려우면서도 해볼 만한 목표(goal), 즉 그들 삶에 의미를 주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 플로우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시합에서 승리하는 것, 어떤 사람과 사귀는 것, 어떤 것을 특정한 방식으로 성취하는 것 등과 같은 자신의 행동 목표가 설정되어 이썽야만 한다. 대체로 목표 그 자체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목표가 그 사람의 주의를 집중시키고, 성취 가능하며 즐거운 활동에 몰입하도록 해준다는 점이다.
* 청고도들이 다른 사람들과 달랐던 점은, 이들과 유사한 선택을 했던 마사다의 유대인들, 기독교 순교자들 그리고 중세 말기 남부 프랑스의 카타르파 신자들처럼 어떠한 박해나 난관에도 결심을 굽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자신의 신념이 이끄는 데로 따랐으며, 자신들이 믿는 가치가 안락과 심지어는 목숩까지도 희생시킬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리고 이들이 이처럼 행동했기 때문에 이들이 세웠던 목표들이 원래 가치가 있는 것들이었는가의 여부와는 관계없이 실제로 보람과 가치가 있는 일들이 되었다. 또한 이들 청교도들의 목표가 헌신을 통해 소중한 것으로 변했기 때문에 이들의 생애에 의미를 부여해 줄 수 있었다.
어떠한 목표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모든 플로우 경험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목표와 그 목표를 위해 기울여야 하는 노력에는 밀접한 상호 관계가 있다. 처음에는 목표들이 그 목표를 위해 기울여야 하는 노력을 정당화해 주지만, 나중에는 바로 그러한 노력들이 목표를 정당화해 준다.
* 문화의 복합성이 진화해 감에 따라 이러한 완전한 결의를 달성 하기가 점차 어려워진다. 너무나 많은 목표들이 서로 우열을 다투고 있는데 과연 어느 것이 전 생애를 바칠 만큼 가치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 풍부해진 선택의 여지로 인해 오늘날 우리는 불과 백 년 전만 하더라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많ㅇ느 개인적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서로 비슷한 매력이 있는 선택들이 많아지면서 불가피하게 초래되는 결과는 목적이 불분명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불확실성은 결의를 약화시킨다. 그리고 결의의 약화는 결국 선택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그러므로 자유가 많아진다고 해서 반드시 인생의 목적을 개발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그 반대의 결과를 낳는다 하겠다.
* 우리의 심리 에너지를 과연 어디에 투자해야 할 것인지 어떻게 해야 알 수 있을까? 우리에게 "바로 이것이 너의 인생을 바칠 만큼 가치 있는 목적이다"라며 방향을 제시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가 의존할 수 있는 어떤 절대적인 확실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각자가 자신의 궁극적 목적을 스스로 찾아내야만 한다.
* 스스로를 아는 것-너무도 오래되어 그 가치를 쉽게 망각하게 되는 고대의 처방-의 과정을 통해 상충되는 삶의 선택 방향을 정할 수 있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문구가 아폴로 신전 신탁의 입구에 새겨진 이래로 수많ㅇ느 경구들이 그 가치를 칭송해 왔다. 이 격언이 그리도 자주 되풀이되는 이유는 바로 그 효과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세대마다 그 의미와 그것이 각자에게 무엇을 암시해 주는지를 새로이 발견해야만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당대의 지식에 맞는 표현으로 바꾸어서 시대에 맞게 그것을 적용시킬 수 있는 방법을 그려보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
* 꼭 필요한 요구들을 추려 내서 그 요구들 사이에 우선 순위를 할당...
* '행동적인 삶(vita activa)'과 '관조적인 삶(vita contemplativa)'
* 자신의 경험에 대한 느낌을 잃은 사람들은 이처럼 쉬워 보이는 질문들에 대한 답도 찾기 힘들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구태여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은, 또는 자신의 외적 목표에만 모든 주의를 집중해 자신의 감정에 미처 관심을 갖지 못하는 사람은 행동을 의미 있게 계획할 수 없다.
* 자기 성찰적 의식이 생기기 전의 인간 본연의 상태는, 배고픔.성욕.고통.위험 등에 의해서만 이따금씩 방해를 받는 평화로운 상태였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그렇게도 많은 번민을 안겨다주는 정신적 엔트로피의 형태들(충족되지 못한 욕구.무너진 기대.외로움.좌절.불안.죄책감)은 모두 최근에 들어와서야 우리의 정신을 괴롭히게 된 것이 분명하다. 이들은 대뇌 피질이 점차 복합화되고 문화의 상징 체계가 풍부해짐에 따라 생겨난 부산물들인 것이다. 즉 이들은 의식의 출현에 따른 부작용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 사회적 역할의 수와 복합성 그리고 대안적 목표와 행동의 진로들이 극히 제한되어 있는 미개발된 문화들에서 오히려 플로우를 경험할 확률이 훨씬 높은 것이 사실이라 할 수 있다...
기술적 진보가 뒤떨어진 민족들이 갖는 내적 조화는 제한된 선택과 안정적 생존 기술로 대표되는 그들 생활의 한 긍정적 단면일 따름이다.
* 기회와 가능성들이 몇 가지 없을 때는 비교적 조화를 이루기가 쉽다. 욕구는 단순하며 선택도 분명하다. 갈등의 여지가 거의 없으며 절충해야 할 필요도 없다. 이것이 바로 단순한 체계의 질서이다. 말하자면, 기회와 선택의 다양성의 결여로 얻어지는 질서인 것이다.
* 자신이 발견한 인생의 주제가 있는 사람은 개인적 경험과 선택에 대한 인식에 입각해 자신의 행동을 위한 대본을 직접 쓰는 사람이며, 받아들인 인생의 주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오래전에 이미 작성해 놓았던 대본에 미리 규정되어 있는 역할을 그저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 삶의 의미를 찾는 데 성공한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찾을 수 있는 전략이 있다면, 그것은 너무나 단순한 것이어서 언급하기조차 무색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종종 많ㅇ느 사람들에게 너무 쉽게 간과되어 온 게 사실이다. 특히 요즈음은 더욱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한 번 살펴보는 것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 전략이란, 옛 세대들이 만들어 놓은 질서 속에서 자신의 마음속의 혼란을 피할 수 있는 것들을 추출해 내는 것이다. 우리의 문화 속에는 이러한 용도로 언제든 사용할 수 있는 많은 지식, 다시 말해 잘 정돈된 정보들이 축적되어 있다. 누구나 위대한 음악.건축.미술.시.연극.무용.철학.종교 등을 통해 서 혼돈 속에서 조화를 창조해 내는 법을 배울 수 있다.
* 성인이 되어 일관성 있는 인생의 주제를 발견한 사람들은 흔히 자신의 어린 시절에 부모님이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책을 읽어주던 일을 회상하곤 한다. 자신이 신뢰하는 애정 깊은 어른들로부터 동화나 성서 이야기, 역사적 영웅들의 무용담, 실감나는 가족사 등을 들으면서, 아이는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의미있는 질서를 형성해 나가는 첫 경험을 하게 된다.
* 복합성을 가진 인생의 주제를 발견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몹시 존경하여 귀감으로 삼았던 연장자나 역사적 인물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