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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스크랩][매일경제][운명을 바꾸는 선택] 위험하게 살라! 짜라투스트라의 외침

[운명을 바꾸는 선택] 위험하게 살라! 짜라투스트라의 외침


기사입력 2012.08.31 12:00:51




세상에는 설명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 하나 있다. 소경에게 빛을 얘기하는 것이다. 어떠한 어휘를 동원한다해도 소경은 빛에 대해 제대로 납득할 수 없다. 볼 수 없는 자에게 빛은 설명 불가능한 단어이자 다른 차원의 얘기이다. 


세상 사람들은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빛을 보는 자이고, 다른 하나는 빛을 보지 않는 자이다. 


후자가 전자보다 훨씬 많다. 눈이 있어도 보지 않는 자, 소경이 많다는 말이다. 왜 보지 않는가. 두려움 때문이다. 두려움 때문에 다른 차원의 세상을 보지 않는 것이고, 보지 못하는 것이다. 


빛은 세상의 실상이다. 세상에는 삶의 실상을 제대로 보지 않으려는 자가 많다. 대신 삶을 왜곡해서 제멋대로 해석하고 싶어 한다. 평생 환상 속에서 헤매다 실상을 보지 못하고 사라질 존재들이다. 


니체는 이러한 인간을 ‘최후의 인간’이라 부르며 경멸했다. 그들은 돈이 무엇인지, 권력이 무엇인지, 인류를 파괴시키는 전쟁이 무엇인지, 지위가 무엇인지 안다. 허나 사랑이 무엇이고 창조가 무엇이고 열망이 무엇이고 별이 무엇인지 모른다.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고, 권위에 굴욕하고, 힘센 자에게 양보하고, 손해보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고, 계산에는 무엇보다 앞서고, 그리고는 이를 현명한 처사라고 자랑하는 게 최후의 인간이다. 


그런 삶은 단지 생존하는 것이지, 결코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살기 위해 사는 것이 최후의 인간의 삶의 정체성이다. 그런 삶은 외소하고 비루한 삶이다. 


최후의 인간에 의해 비틀려지고 외소화된 환상의 첫마디는 삶의 실상은 안정된 것이라는 엉뚱한 시각이다. 소경처럼 실상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안정된 것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안정된 삶도 없고 그에 따른 만족도 없다. 삶의 실상은 불안정하다. 그리고 인간이란 존재는 불만족을 기본 속성으로 가지고 있다. 안정과 만족을 버리라고 니체는 고대의 신비주의자 짜라투스트라의 입을 통해 거듭해서 촉구했다. 짜라투스트라가 외치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위험하게 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만족이란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동물과 초인 사이에 놓인 하나의 밧줄이다. 인간은 심연 위에 걸쳐 놓은 밧줄이다. 그것을 넘어서는 것은 위험하며 그 위를 걷는 것도 위험하다. 뒤를 돌아보는 것도 위험하며 벌벌 떨며 제자리에 서 있는 것 또한 위험하다.” 


밧줄은 건너가라고 놓인 것이다. 밧줄 위에 집을 지으라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밧줄 위에 방어벽을 세운다. 두렵기 때문이다. 두려움은 최후의 인간의 속성이다. 두려워서 건너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는 것이다. 바람을 막을 방벽을 주변에 쌓고 밑에 도사린 심연을 보지 않기 위해 차단을 하고, 그리고선 안전하다고 믿는다. 한순간의 비바람, 아니 서푼도 되지 않는 바람에 흔들릴 밧줄 위에서 말이다. 


삶은 불안정하다. 곳곳에 위험투성인 장애물이 놓여 있다. 밑은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은 물이다. 심연으로 떨어지는 것은 일순간의 일이다. 허나 떨어지면 떨어질지라도 밧줄을 타고 건너야만 한다.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용기를 갖고 건너다보면 저 너머로 갈 수 있다는 희망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이점이 못내 안타까운지 짜라투스트라는 다음과 같은 말을 잇는다. ‘만족하지 말라’, 그가 외치는 두 번째의 강렬한 호소이다. 


“인간의 위대한 점은 그가 하나의 다리이지 결코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의 진정한 삶에는 목적지가 없다. 지평선을 향해 계속 가야만 된다. 삶이 끝날 때까지. 도달했다고 만족하는 순간 지평선은 저기 멀리 떨어져 있다. 진정한 인간에게 만족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다. 진정한 조직, 진정한 기업, 진정한 국가에게도 만족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이시대의 위대한 기업으로 평가받는 휴렛패커드 마케팅 매니저의 말을 들어보자. 


“‘드디어 도착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궁극적 종착역은 없다. 나는 우리들이 성공에 결코 만족하지 않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바로 그때가 우리의 운명이 기울기 시작하는 때이기 때문이다.” 


만족이란 짜라투스트라가 말하는 최후의 인간의 수식어일 뿐이다. 최후의 인간에 반대편에 진정한 인간인 초인이 있다. 짜라투스트라는 인간들에게 초인을 가르친다. 


“인간이란 초극되어야 할 무엇이다. 그대들은 인간을 초극하기 위해 무엇을 해왔는가.” 


인간이란 고정된 존재가 아니다. 밧줄위에 고정된 인간이 아니다. 밧줄을 잡고 저 먼 곳, 끝 간 데를 모를 곳으로 넘어서야 하는 존재이다. 밧줄의 다른 한 쪽 끝으로 가는 것은 금물이다. 그곳으로 돌아가는 것, 밧줄 위에 주저앉는 것은 경멸받아 마땅하다. 인간이 원숭이로 전락하고 말기 때문이다. 


“원숭이는 인간에 대해 무엇인가. 웃음거리이든가, 그렇지 않으면 비통한 치욕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초인에 대해 웃음거리이거나 비통한 치욕이다.” 


인간이 위대하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뛰어넘는 초극의 길로 가기 때문이다. 인간의 위대성은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초인으로 거듭나고 초인으로 죽는데 있다. 인간이 인간으로 태어나고 인간으로 죽는다면, 그게 짐승과 무슨 차이가 있다는 말인가. 짐승은 짐승으로 태어나 짐승으로 죽는다. 인간은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인간으로 죽는다면 짐승과 다를 게 없다. 


2004년 여름에 재미있는 보고가 나왔다. 


인간과 원숭이의 유전물질이 불과 5% 이내 차이에 불과하다는 게 당시 과학계의 정설이었다. 허나 유전자 상호작용으로 나오는 유전자산물은 80%정도가 동일하지 않다는 놀라운 보고가 나온 것이다. 이 보고로 볼 때 인간과 짐승의 차이는 유전자 자체라기보다는 유전자 산물들의 상호작용이다. 


인간은 처음부터 주어진 것을 통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갖고 활동한 결과치로 나타나는 것이다. 즉 어떤 의지를 갖고 활동하느냐에 따라 인간은 인간으로 주저앉기도 하고 짐승으로 혹은 초인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짜라투스트라는 짐승으로의 나락에는 관심이 없다. 


짜라투스트라는 거듭해서 인간은 심연 위에 걸쳐놓은 밧줄이라고 설파한다. 인간은 밧줄이고, 밧줄은 건너서 지나가야 하는 것이다. 두려움을 버리고 위험한 발상을 하지 않으면 건널 수 없다. 익숙한 것보다는 낯선 것, 안전한 것보다는 불안전한 것, 안정보다는 불안정한 것을 끊임없이 추구하면서 살지 않으면 밧줄 저 너머로 갈 수 없다. 세속적인 가치인 안전 ,안정, 낯익은 것, 만족, 평온, 편함 등을 삶의 지표로 삼아서는 밧줄 건너편으로 넘어갈 수 없다. 


초인에의 완성은 자기 한계를 알면서도 거기에 머물려 하지 않는데 있다. 여기서 나오는 단어가 염원이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만 원하는 것은 염원이 아니다. 할 수 없는 것을 원하는 것이 염원이다. 할 수 있는 것은 세속적인 것이다. 세속적인 것을 욕망하지 않고, 비세속적인 것을 염원하는 태도가 초인을 잉태하는 것이다. 비세속적인 것은 인간의 영역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사람에 따라서는 평생 도달하지 못할 거리에 놓여 있다. 그것을 얻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허나 인간은 불가능한 것을 염원하지 않는 한 위대한 존재가 될 수 없다. 이 부문에서 필요한 것은 용기이다. 용기는 욕망의 영역이 아니라 염원의 영역이다. 할 수 있는 것 만을 원하는 것은 용기가 아니다. 도달하기 힘든 것을 원하는 것은 용기 없으면 불가능하다. 그 용기가 삶과 죽음, 승패를 가르는 분수령이라는 것은 수많은 일화가 증명하고 있다. 


용기라는 단어로 비즈니스의 세계를 들여다 보자. 


한때 세계 필름시장을 삼분한 것은 코닥과 후지 아그파이다. 코닥이 1인자였고 후지가 그를 따르는 형국이었다. 1980년대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2005년 아그파가, 2012년 초에 코닥이 파산했다. 후지는 그동안 변신을 거듭해 의료 전자소재 화장품 분야에서 연간매출액 3조 엔을 오르내리는 세계적인 기업으로 재탄생했다. 재탄생의 배경으로는 용기를 꼽지 않을 수 없다. 디지털 환경의 변화로 필름시장이 요동칠 때 후지는 과감히 ‘탈필름 구조조정’에 들어간 게 제대로 먹힌 것이다. 모든 것을 던지는 용기가 없으면 어려운 일이다. 이를 실증하듯 일본 도쿄 미드타운 후지필름 본사 접견실에 들어서면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용기라는 글귀이다. 벽 한 면을 장식하고 있다. 


올해로 10년째 후지선(船)을 이끌고 있는 고모리 시게타가 사장은 용기를 자신의 모토로 삼고 있다. 


“중요한 일은 용기를 갖고 밀어붙여야 한다는 점에서 용기를 중시한다.” 


위험, 불만족, 밧줄, 저 너머, 염원, 용기로 이어지는 코드는 인류 지혜의 맥이다. 삶의 맥이자 승자의 맥이며, 진리의 맥이다. 그 맥은 수천 년간 인간의 삶을 지배해왔으나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니체가 찾아낸 고대 페르시아 왕조시대의 짜라투스트라는 실존인물을 통해 우리는 그 실체를 다소나마 접할 수 있게 됐다. 


짜라투스트라는 거듭 위험하게 살라고 말했다. 사실 위험하게 사는 것은 힘든 일이다. 고대 그리스 서사시인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 나오는 ‘스킬라가 사는 섬과 카립디스가 사는 해변을’ 통과해야 하는 것만큼 험난하다. 스킬라와 카립디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괴물로 지나가는 배를 침몰시키는 것으로 유명하다. 


허나 그 이상 매력적인 일이다. 그 사람을 성장케 하고, 씨앗에 머물고 말 사람을 열매 맺게 하는 마력적인 힘이 위험에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가치는 그 사람이 위험하게 사는가를 살펴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 사람의 진정성 여부 또한 위험에 대해 취하는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위험에 대한 새로운 시각은 전적으로 짜라투스트라 덕분이다. 


앞서 세상에는 설명 불가능한 일이 하나 있다고 했다.


소경에게 빛을 설명하는 일이다. 그런데 하나 더 추가해야 겠다. 두려움에 떨면서 자신의 방어벽 쌓기에 연연하는 최후의 인간, 손해볼까봐 자질구레한 일에도 따지고 들면서 일의 흐름을 놓치고 마는 최후의 인간에게 위험하게 살라고 요구하는 것 또한 불가능한 일이다. 


[정보철 : (주)이니야 대표, `고전경영` `한 끗 차이`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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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원문 : http://news.mk.co.kr/v3/view.php?sc=30000001&cm=%C7%EC%B5%E5%B6%F3%C0%CE&year=2012&no=554081&relatedcode=&sID=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