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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을 바꾸는 선택] 진정성의 가치, 잡초가 썩은 백합보다 화려하다


기사입력 2012.07.10 16:03:09




명예실종. 그렇다. 요즘의 상황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명예실종이었다. 


대선정국이다 보니 정치권과 관련해 특히 많은 말들이 나오고 있다. 다양한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만큼 여러 해석이 나올 법도 한데 딱히 누가 선뜻 나서 정치권의 흐름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C일보의 선임기자가 불쑥 말을 던졌다. 


“요즘은 명예가 없는 것 같아요. 명예를 모르는 사람들 천지예요.” 


명예를 모르는 사람과 사회라니 갑자기 아득해지는 느낌이다. 로마시대로 돌아가서 한 인물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킨킨나투스이다. 


킨킨나투스는 한때 재산도 많았고, 로마 최고의 직위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아들인 카이소의 폭행사건으로 재산이 몰수 돼 빈털터리가 된 후 로마 변두리로 쫓겨났다. 변두리의 버려진 땅에서 그가 하는 일은 쟁기질, 바로 농장을 가꾸는 일이었다. 


한편 로마 근처 산중에 살던 부족들이 연합해서 로마를 침공해왔다. 로마의 두 집정관이 모두 출정해 적과 교전을 벌였지만 적들에게 숙영지가 포위되고 말았다. 사령관을 포함해 1개 군단이 전멸할 위기에 처하자 로마의 원로들은 이 상황을 국가의 위기로 규정하고 킨킨나투스를 찾았다. 


로마의 대표단이 킨킨나투스를 찾아갔을 때 역시 그는 밭에서 쟁기질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에게 로마가 큰 위기에 처했다고 소식을 전했다. 


“로마 시민들은 당신을 로마의 통치자로 선출하여 전권을 맡겼습니다. 그리고 원로들은 당신이 당장 저 흉맹한 산족과 맞서 싸워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기원전 458년에 이어 439년에 또다시 독재관에 임명된 것이다. 독재관이란 국가 비상시에 집정관 두 명을 대신한 관직이다. 지금으로 치면 계엄사령관과 대통령을 겸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는 직책이다. 


킨킨나투스는 쟁기를 던지고 곧장 로마로 달려갔다. 그는 앞장서서 산족에게 포위된 채 고군분투하고 있던 로마군을 구해냈다. 산족들은 큰 손실을 입고 쫓겨났다. 로마로 개선한 그가 가장 먼저 한일은 뜻밖에도 독재관 자리를 내놓는 것이었다. 로마시민들이 감사의 뜻을 전하기 전에 그는 모든 권한을 로마 원로들에게 돌려주고 다시 그 버려진 땅으로 돌아갔다. 그가 독재관 자리에 있는 기일은 불과 16일. 적과 싸우는 단 그 기간만 독재관 자리에 앉았다. 놀라운 것은 독재관의 지위를 활용, 몰수된 재산을 찾거나 억울함을 풀기 위한 어떠한 조치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참고로 독재관 임기는 여섯 달이었다. 


역사서에는 킨킨나투스의 얘기는 간결한 사실만 적혀있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이야기’ 1편에도 킨킨나투스의 일화는 단 세 줄로 요약돼 있다. 허나 그 짧은 서술에 함축돼있는 스토리가 토해내는 울림은 얼마나 강렬한가. 


중국 동진시대의 전원시인 도연명의 귀거래사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스토리다. 나라의 녹봉을 받다가 모든 것을 던지고 쟁기질을 하러 가는 것은 똑같지만 그 속에 담겨 있는 여운은 그 격이 다르다. 한사람은 자신의 일신상의 불편함을 찾지 못해, 또 한사람은 진정한 명예를 지키기 위해 세속으로부터 사라진 것이다. 


스스로 이름을 구하려는 명예심과는 달리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명예는 차원을 달리한다. 전자는 정신수준이 낮은 자들의 무늬뿐인 명예이고, 후자는 진실한 리더십을 가진 자들에서 도 흔치 않은 명예이다. 앞서 얘기한 명예실종은 당연히 진실한 사람의 명예를 말하는 것이다. 명예를 말할 때 우리가 그 진정성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킨킨나투스가 로마로 개선했을 때 사람들은 걱정했었다. 그가 로마를 좌우할 전권을 가졌고, 로마는 그를 추방한 사실 때문이었다. 허나 그는 적과 싸우는 16일 동안만 로마를 통치했다. 나라와 국민의 이름으로 일으킨 혁명과 쿠데타가 결국은 자신의 일신상의 권력과 부를 위하여 장기집권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수없는 증언을 고려할 때 이는 아주 기이한 사건이었다. 킨킨나투스의 로마를 위하는 진정성에 대한 이해 없이는 이 사건을 해석할 방법이 전혀 없다. 


진정성은 이 시대의 화두가 돼 버렸다. 진정성과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사람들도 진정성을 들먹거린다. 결국에는 쇠고랑을 찬 부패한 기업인뿐만 아니라 사악한 정치인마저 진정성을 운운한다. 화려만 외면만 자랑하는 연예인들의 진정성 거들먹거림도 가관이다. 


진정성이란 무엇인가.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충실한 것을 말한다. 내면에 충실한 것은 ‘초심(初心)’에 버금가는 것이 없다. 초심에 사심이 담겨 있을 리 없다. 한 끌 티 없이 순일무잡(純一無雜)한 그 마음이 초심이며, 내면의 자아와 행동하는 자아가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것이 진정성이다. 


진정성의 속성은 일관성, 정직성, 성실성, 투명성, 신뢰성, 순수성, 일치성, 통합성 등이다. 이러한 요소들의 특성은 한 개인의 욕심과는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진정성은 자신의 이익을 창출하기 위하여 남을 이용하겠다는 욕심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다른 사람을 자신의 도구로 사용하려는 생각 자체가 없는 것이 진정성이다.그래서 초심으로 대변되는 진정성은 자신뿐만 아니라 남을 설득하는 힘이 남다르고 일을 성취하는 힘이 탁월하다. 


진정성은 특별하고 강력한 두 개의 힘을 갖고 있다. 하나는 기업과 조직의 존재를 지속 가능케 하는 힘이다. 단기적인 레이스보다 장기적인 레이스를 염두에 두고 달리는 마라토너처럼 흔들림 없이 기업과 조직을 길게 이끌어가는 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같은 진정성의 지속 능력을 활용, 사회로부터 꾸준히 사랑을 받아오는 기업을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대표적인 예가 유한양행이다. 유한양행의 창립자 유일한 박사는 상표를 버드나무로 새겼다. 버드나무는 여름날 뜨거운 태양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사람들이 햇빛을 피해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자는 의미에서 버드나무 상표를 만든 것이다. 진정성의 상징인 버들표에서 보듯 그는 회사의 이익보다는 국민의 건강을 챙겼다. 여타 기업에서는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사회적 책임을 버들표를 통해 추구해 왔다. 그 결과 1926년 미국에서 설립된 이래 일제시대 6.25 등 거친 풍랑을 거치면서도 근 90년간 국민들의 사랑을 줄기차게 받아오고 있다. 


또 다른 진정성의 힘은 조직과 주변, 기업과 사회를 동시에 상생하게 만드는 힘이다. 독단적으로 혼자 달리는 레이스를 펼치는 것이 아니라 남과 더불어 함께하는 레이스를 펼치는 것이다.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함께 가자’는 진정성의 슬로건이다.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 스타벅스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하워드 슐츠는 매일 매장을 찾아오는 초로의 남자가 기억했다. 휴일날을 제외하고 하루도 매장 방문을 게을리 하지 않는 남자는 특이한 손님이었다. 한 잔의 커피를 시켜놓고 두어시간 상념에 잠겨 있는 남자의 모습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누구를 기다리는 것도, 스타벅스 매장에서 그 무엇을 찾으려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반년이 지날 무렵 슐츠는 용기를 내어 그 남자에게 말을 건넸다. 직장에서 해고된 남자였다. 


“해고된 것을 아내는 모르지요. 출근시간에 맞춰 집을 나서지만 어디 뚜렷하게 갈만한 곳을 찾지 못해….” 


순간 슐츠의 머리에는 아버지의 초라한 모습이 떠올랐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경제적으로 무능했던 아버지를 미워했던 지난날이 갑자기 후회스러워졌다. 


‘자식들을 위해 평생 일해 온 부모들은 결코 비난받아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스타벅스의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은 이때부터다. 


아버지처럼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안정적인 고용기회를 제공하고, 삶을 즐길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는 회사를 만들기로 결심한 것이다. 최고의 커피를 만들겠다는 애초의 약속이 영혼이 담겨 있는 회사로 키워보겠다는 맹세로 승화한 것이다. 그가 찾는 영혼의 회사는 직원과 고객, 협력업체들이 함께 어울려 편하게 숨을 쉬는 공간을 말한다. 


스타벅스가 단순히 최고의 커피맛에 치중했다면 지금처럼 정상에 서있지 못했을 것이다. 스타벅스 성공은 진정성에서 찾아야 한다. 남들이 얘기하듯이 커피 맛이나 운영에 달려 있지 않았다. 하워드 슐츠는 ‘스타벅스 커피한잔에 담긴 성공 신화’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진정성은 우리가 지향하는 목표이다. 그것은 우리 정체성의 일부이다. 만약 우리가 정체성을 포기하고 더 높은 수익과 타협한다면 과연 우리가 무엇을 이룰 수 있을까. 결국 우리의 모든 소비자들은 우리의 정체성을 파악할 것이다.” 


진정성의 힘에서 우리가 주목할 게 하나 있다. 네비게이션이다. 진정성은 사업이나 인생 항로에서 네비게이션 역할을 한다. 네비게이션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방향은 엉망이 되고 보다 높은 목표를 지향하기보다는 당장 눈에 보이는 곳을 향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이들이 그려 낸 방향은 일관되지 않다. 술 취한 사람처럼 갈지자를 그려낼 따름이다. 큰 그림을 볼 수 있는 안목을 잃어버리고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면서 잦은 실수를 하게 된다. 그들이 그려내는 스토리는 뒤엉켜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진정성 있는 리더에게는 탁월한 도구가 하나 있다. 그것은 우월한 유전인자를 갖고 있는 네비게이션이다. 남들과 달리 시시각각으로 업데이트되는 네비게이션으로 그들은 자신의 삶의 방향과 일에 대한 방향설정을 하면서 긴장의 끈을 놓치고 있지 않는다. 그것은 높은 성과로 이어진다. 진정성을 가진 리더들이 한결 같이 자신의 분야에 전문성이 높다는 것은 상기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분야에서 고도의 숙련을 거친 리더들이 방향설정이 탁월한 네비게이션과 만나게되면 고성과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맥도널드의 캔달루포를 보자. 맥도널드는 짐 캔달루포를 다시 불러 들였다. CEO경쟁에서 밀려나 퇴직한 상태로 있던 그를 불러들인 것은 지난 2003년 역사상 최초의 영업 손실 때문이었다. 영업 손실의 원인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동안 맥도널드의 사업범위를 넓혀준 것으로 알려진 부동산 사업과 해피밀 프로그램이었다. 월간 프로모션에 집중한 단기 판매증진에만 초점을 맞춘 마케팅 전략이 원인이었다. 맥도널드는 햄버거 판매수익보다는 프랜차이즈 매장의 임대수익이 낫다는 것을 알고 매장을 매입해서 임대해주는 사업을 확장해왔다. 부동산 임대업을 추가한 것이다. 당연히 맥도널드의 정체성은 퇴색되기 시작했고, 이것이 부메랑으로 돌아와 맥도널드는 서서히 침체의 늪으로 빠지게 됐다. 


기업을 성공으로 이끄는 것은 힘들다. 그보다 힘든 것은 성공한 기업을 재탄생시키는 것이다. 과거의 성공 경험과 습관을 버리는 것은 지극히 어렵기 때문이다. 짐 캔달루포는 어떻게 맥도널드를 재탄생시켰을까. 바로 초심으로 돌아가는 진정성이다. 


복귀한 짐 캔달루포는 제일 먼저 맥도널드의 사업을 재정의했다. 맥도널드의 브랜드 파워의 핵심이었던 깨끗한 매장, 바른 서비스, 따뜻한 음식이라는 3가지 기본원칙을 강조했다. 단기적인 수익 증진 전략을 포기하고 당장 돈이 되지 않더라도 기본원칙을 철저히 지킬 것을 반복적으로 강조했다. 창업자인 레이 크록이 구상한 해피 플레이스(happy place, 행복한 공간)로 네비게이션을 맞춘 것이다. 


초심을 되찾은 맥도널드의 진정성은 다시 고객들을 불러 들이기 시작했다. 매출은 급신장했고, 주가는 그가 재임하는 동안 두 배 이상으로 뛰어올랐다. 


이밖에 루 거스너의 IBM, 제임스 버크의 존슨앤존슨 등 잘 알려진 사례에서 보듯이 기업의 재탄생에는 항상 CEO의 진정성과 여기서 바탕을 둔 진정성 있는 기업문화가 항상 버팀목 역할을 한다. 


이들 기업 외에 대부분의 기업은 재탄생 고비에서 주저앉는다. 그 이유를 설명하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다. 한마디로 진정성 부족이다. 누구의 말대로 ‘진정성은 희귀한 자원’이라는 내용은 비즈니스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중국 초한지에 나오는 스토리다. 역사가들은 시골 무뢰배에 지나지 않은 유방이 항우를 무찌르고 천하를 평정했다고 평가한다. 무뢰배라지만 남다른 점은 있지 않았을까. 유방은 무엇보다 사람 보는 눈이 남달랐다. 대표적인 예가 자신을 찾아온 항우의 부하였던 진평과 정공을 대하는 태도였다. 진평은 중히 여겼고, 정공은 죽여버렸다. 그 이유는 진정성에서 찾아야 한다. 


진평은 어려운 처지에서 유방을 찾아왔기에 유방에 대한 충성심이 높았고, 사심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반면 정공은 어느 쪽 세력이 더 강한지 살펴서 강한 쪽에 붙으려 했었다. 


정공은 항우와 유방의 전투에서 말 한 마리를 제공해 유방의 목숨을 살려준 일이 있었다. 그 일을 믿고 나중에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자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유방을 찾은 것이다. 죽이고 살리는 척도가 바로 진정성이었던 것이다. 그 사람의 진정성을 보고 사람을 선택한 유방이 결국 천하를 제패했다고 말한다면 다소 억측일까. 리더가 사람을 선택하는 기준으로 진정성을 고려하는 것은 의미 깊은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진정성의 핵심으로 성큼 들어가 보자. 속마음과 겉마음이 같고, 너와 나가 다르지 않다는 진정성의 진수 말이다. 20세기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끼친 유대인 철학자 마르틴 부버의 얘기다. 명저 ‘나와 너‘에서 그는 스스로 존재하는 ‘나는 없다’고 단언한다. 나는 항상 관계가 있을 때 비로소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네가 있고 내가 있는 것이며, 그것이 있고 내가 있다는 말이다. 


‘나와 그것’에서 벗어나 ‘나와 너’의 관계를 기조로 한 마르틴 부버의 인격주의 철학은 20세기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허나 부버의 철학은 진정성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나와 너’는 관계의 개념이기 전에 분리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일치가 진정성의 한 속성이라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나와 너를 분리해서 보는 것은 시야가 좁은 것이다. 폭넓은 시각에서 ‘나의 너’, 혹은 ‘너의 나’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나의 너’는 시대가 요구하는 진정성에 보다 한발 다가서는 것이다. 나의 너로 바라보는 세상은 진정성이 넘치는 세상, 그리고 모두가 함께 하는 행복한 세상인 것이다. 


최근 시장자본주의에 대한 논란이 가속화되고 있다. 시장경제를 악용한 자본가들 때문에 시장이 그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밀턴 프리드먼이 주창한 시장 중심의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은 이제 역기능에 노출되었다. 프리드먼에게 부족한 부문은 함께하는 가치와 정신이다. 21세기 들어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는 4.0자본주의의 슬로건은 ‘함께 하자’는 것이다. 모두가 상생할 수 있는 길을 찾아보자는게 4.0자본주의의 핵심이다. 바로 진정성의 문제이다. ‘나와 그것’이 아닌 ‘나와 너’를 넘어서 ‘나의 너’에 대한 화두가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서두에서 진정성과 진정한 명예를 얘기하기 위해 킨킨나투스를 끌어들였다. 킨킨나투스가 존중받는 사회는 명예로운 사회이다. 화려한 외면에 속고 속이는 사회가 아닌 소박하지만 진정이 넘치는 사회가 진짜 화려한 사회이다. 정말 화려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진정성만한 가치는 없다. 


‘썩은 백합꽃은 잡초보다도 그 냄새가 고약하다’는 셰익스피어의 비유는 틀렸다. 화려한 외관보다는 내용있는 실속이 아름다운 것이다. 생생한 잡초는 그 자체로 진정성 있는 식물이다. 진정성 있는 존재는 그 자체로 좋은 향기가 나는 법이다. 


[정보철 : (주)이니야 대표, `고전경영` `한 끗 차이`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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