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일감몰아주기 급감
기사입력 2012.05.16 20:20:17
삼성전자의 빌딩 유지ㆍ관리와 사내식당 운영 등을 맡고 있는 에버랜드는 올 1분기 삼성전자와의 거래 규모가 1398억원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에버랜드 1분기 매출의 0.12%에 해당하는 규모다. 그러나 지난해 말 당초 예상했던 삼성전자와의 거래 규모 3650억원에 비해 절반 이하로 줄어든 것이다.
삼성전자의 정보통신 공사 등을 맡고 있는 삼성SNS도 올 1분기 삼성전자와의 거래액 규모가 큰 폭으로 줄었다. 삼성전자는 당초 올 1분기 삼성SNS와 1분기 거래액을 1550억원으로 배정했으나 실제 매출은 40% 선에도 못 미치는 653억원을 기록했다.
매일경제신문이 16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를 분석한 결과 계열사와의 내부거래 규모를 예정액보다 20% 이상 줄여 `동일인 등 출자 계열회사와의 상품ㆍ용역거래 변경`을 공시한 기업은 모두 31개로 나타났다. 이는 지난해 내부거래 규모 20% 이상 감축 기업 수 16개에 비해 두 배 가까이 늘어난 것이다.
전자공시 규정에 따르면 거래 규모가 20% 이상 변동할 때에만 공시하도록 돼 있어 실제로 내부거래가 줄어든 회사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보인다.
내부거래 규모를 20% 이상 줄인 31개 기업 중 현대차그룹 계열사가 11개로 가장 많았고 삼성그룹 계열사 10개, 한화그룹 계열사 3개, GS그룹 2개 순이었다.
현대자동차는 계열 광고회사인 이노션과 올 1분기 내부거래 금액을 480억원으로 계획했으나 실제 집행된 규모는 247억원에 불과했다.
철강 유통업과 자동차 부품제조업을 주력으로 하는 현대차그룹 계열사인 삼우의 올 1분기 내부거래 규모 역시 1314억원으로 예상치 1958억원보다 크게 줄었다.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는 모두 1분기에 예상을 뛰어넘는 실적을 기록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처럼 내부거래 규모가 줄어든 것은 실적 부진에 따른 자연 감소가 아니라 경영진 의지가 반영된 자발적 축소라고 판단할 수 있다.
김동수 공정거래위원장은 이날 "다음달부터 대기업의 내부거래 현황 등 정보를 공개하는 등 일감 몰아주기에 대한 제재를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 <용어 설명>
내부거래 : 대규모 기업집단에 소속된 계열회사 간 거래행위를 의미한다. 일감 몰아주기 등 내부거래가 공정 거래를 저해할 수 있어 공정거래법상 그룹 소속 계열사끼리는 50억원 이상 또는 자본금 10% 이상 되는 대규모 내부거래를 할 때는 이사회 의결을 거쳐 공시하도록 돼 있다.
■ 1분기 대기업 내부거래 크게 줄어
대기업 계열사의 일감 몰아주기에 대한 사회적 비판이 확대되면서 대기업들도 자구 노력에 속도를 내고 있다. 삼성, 한화, SK그룹이 아이마켓코리아 등 MRO 회사를 떼어내고 신라호텔과 롯데그룹이 운영하던 빵집을 매각한 데 이어 계열회사와 내부 거래 규모도 줄여나가고 있는 것이다.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지난해 말 세법이 개정되면서 올해부터 계열사 간 일감 몰아주기로 인한 이익을 증여로 간주해 일감을 받은 기업 대주주에게는 증여세가 부과되기 때문이다.
이에 따르면 일감을 받은 수혜법인 영업이익 중 일감 몰아주기와 관련된 부분을 수혜법인 지배주주 등이 증여받은 것으로 의제해 과세하기로 했다. 계열사 간 거래비율이 30%를 초과하면 일감 몰아주기로 보고, 그 초과이익에 대해 3% 이상 지분을 보유한 친척 등 대주주와 특수관계인에게 과세하기로 한 것이다.
예를 들면 A기업 매출과 세후영업이익이 각각 1000억원, 100억원이고 특수관계법인과 거래한 금액이 700억원이라면 A기업 지분을 10% 보유한 지배주주에게는 2억8000만원 정도 증여세가 과세된다. 따라서 내부 거래 비율을 줄일 필요가 있는 셈이다.
10대 그룹 경영진은 올해 1월 16일 김동수 공정거래위원장과 간담회하는 자리에서 "광고, 시스템통합(SI), 물류, 건설 등 일감 몰아주기가 집중된 분야에 경쟁입찰을 확대하고 내부 거래 규모를 자발적으로 줄여나가겠다"고 약속했다. 올해 1분기 내부 거래 규모가 줄어든 것은 이런 약속에 따른 것이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부품이나 물류 분야에서 일부 계열회사 물량을 비계열 부품사 물량으로 배정하는 등 자발적인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며 "하지만 안정적인 공급과 제품 생산을 방해하지 않고 비율을 눈에 띄게 줄이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일감 몰아주기 과세를 피하기 위해 이처럼 내부 거래 규모를 줄이기도 하지만 합병 등 방법을 이용하는 기업들도 있다.
코스닥 상장사인 인지디스플레이는 지난달 계열회사인 세라트론과 합병하기로 결정했다. 세라트론은 인지디스플레이 대표이사인 정구용 회장과 그 일가가 지분 100%를 보유하고 있는 회사다. 세라트론 매출 대부분이 인지디스플레이에 납품하는 TFT-LCD와 모바일 부품이기 때문에 이 회사가 올해 말까지 존속하면 정구용 회장 일가 등은 증여세를 내야 하는 상황이다.
홍성대 세무법인 천일 대표세무사는 "중소기업 가운데 사업 부문 일부를 분리해 친족들이 대부분 지분을 가진 별도 회사로 만든 곳이 많다"며 "이런 회사가 과세를 피하기 위해서는 합병이 가장 합리적인 대안"이라고 설명했다.
동국제강 계열사인 인터지스와 DK에스앤드 간 합병도 일감 몰아주기에 따른 과세 회피 목적으로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인터지스는 지난달 인터지스 1대 DK에스앤드 4.332054 비율로 DK에스앤드를 흡수ㆍ합병하기로 했다. DK에스앤드는 장세주 동국제강 회장 친인척이 지분 90%를 보유한 회사다. DK에스앤드는 2006년 설립돼 전용선과 일반선 등을 보유한 해운회사다. 동국제강 관련 물량을 주력으로 운송해 관련 매출 의존도가 절대적이다. 합병하지 않으면 내년에 장 회장 친인척들은 증여세 과세 대상자가 된다.
올해 초 합병을 결정한 일진머티리얼즈와 일진반도체도 비슷한 사례다. 일진반도체는 허진규 일진그룹 회장 큰사위인 김하철 일진반도체 대표와 장녀인 허세경 씨, 허진구 회장 등이 주요 주주로 참여하고 있다. 일진반도체는 LED 패키징과 조명을 담당하는 비상장사로 일진머티리얼즈 등과 거래하는 비중이 높다.
지난달 개정 상법 시행으로 합병 작업도 쉬워졌다. 개정 상법은 △주주총회 때 특별결의 없이 이사회 의결만으로 합병이 가능한 소규모 합병 요건을 5%에서 10%까지 완화 △교부금 흡수ㆍ합병 시 합병 대가로 주식 대신 현금 등 현물 제공 가능 △자회사를 만들어 다른 회사를 인수하면서 모회사 주식을 주는 삼각 합병 등을 허용했다.
업계 관계자는 "일감 몰아주기 과세를 피할 뿐 아니라 기업 재편을 하기 위한 용도로 합병이 활용되고 있다"며 "하반기로 갈수록 이 같은 추세는 가속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기철 기자 / 이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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